언론속의 국민

[너섬情談] 아파트 환상 / 이경훈(건축학부) 교수

 

억울하겠다. 여당의 미래주거추진단 단장이자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인 진선미 의원이 지난 20일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공공임대사업 다세대주택을 둘러보며 덕담으로 건넨 말이 파문을 불러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케이크 발언과 비교하며 현실감 없는 의원으로 비난받으니 정말 억울하겠다.

 

아파트 환상은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 단지에 대한 환상이다. 도심이나 전원이나 할 것 없이 아파트가 단지 형태로 지어지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거기엔 몇 가지 층위의 배경이 있다.

 

개발시대에 아파트 단지는 도시와 공공이 담당했어야 할 기반시설을 사적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공원, 놀이터, 방범 그리고 주차장까지 우월한 정주 환경을 제공했다. 대신 웃돈을 받았다. 이후 단지는 주민의 폐쇄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 됐고 대기업 브랜드와 결합해 강화됐다. 이를 바탕으로 아파트는 가계의 가장 큰 자산이 됐으며 단지는 자본소득을 위해 중요한 이익의 공동체가 됐다. 녹지와 주차장 그리고 배타적 커뮤니티가 결핍된 다세대주택의 방 개수를 가지고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러니 그리 억울해 할 일만도 아니다.

 

아파트에 대한 환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정부와 공공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이 공동의 환상에 굴복하고 이를 만족하게 하는 정책을 무한정 내거나 그 환상이 영속할 수 없는 허구이며 도시 특성을 담은 대안의 공간을 제시하는 것이 다른 하나일 것이다.

 

영국 문화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방대한 문학작품을 분석한 1973년의 저작 ‘시골과 도시’로 유명하다. 책에서 그는 산업혁명 이후 근대 도시가 형성되며 옛 시골 마을을 신비화하고 유기적 공동체로 이상화하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허구에 가깝다고 통박한다. 목가적 장면은 극소수의 지배 또는 유산 계급만이 누리던 예외적 특권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분법이 공간구조로 전이돼 시골 또는 자연이 이상화되고 신비화되는 경향을 경계한다. 도시 공간은 막연한 시골의 향수에서 벗어난 양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거의 형태도 다르다. 우거진 숲이 아니더라도 빽빽이 늘어선 이웃 건물이 만드는 풍경도 가치 있는 경관이다. 남향이 아니더라도 북쪽의 거리로 트여 있다면 피할 일도 아니다. 상점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잔재미도 대자연의 풍광만큼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자동차의 편리함 대신 거리를 걸으며 이웃과 소통하는 유쾌함을 선택할 수도 있다.

 

듬성듬성 건물을 배치하고 그 사이를 나무가 우거진 정원으로 채우는 아파트 단지는 도심에서 전원의 삶을 누리겠다는 불가능한 욕망의 산물이다. 교통이나 교육, 의료, 문화 등 여건이 좋은 도심을 놔두고 수십㎞ 떨어진 곳에 신도시를 만드는 일도 결국 아파트 환상을 좇는 일이 아닌가. 그 결과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출퇴근 시간이 가장 긴 나라가 됐다. 도심의 단지는 단지대로 걷는 사람 없이 자동차만 오가는 황폐한 미국식 서브어반이 돼가고 있다.

 

이제는 이전 세대 도시가 제공하지 못했던 기반시설을 제공할 여력을 갖췄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생활에 밀착된 인프라를 구축하고 본격적인 도심 주거를 만드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다. 모든 세대가 남향이어야 한다는 한국토지주택공사나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설계조건부터 바꾸고 명실상부한 도시 주거를 만들어 보기를 제안한다. 진정한 도시 주거가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고 경제를 살릴 수 있으며 환상과 경쟁할 수 있다. 한 채면 족하다. 도시에 사는 편리함과 재미와 유용함을 느끼게 해주는 단 한 채의 도시 주거가 있다면 아파트 단지의 견고한 환상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단 하나의 사례라도 만드는 데 힘을 보탠다면 억울함을 희망으로 돌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경훈 (국민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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