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창간89특집/임정 수립 90주년] 여성·농민·노동자 참여… 독립운동 들불처럼 확산 / 장석흥 (국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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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과 대한독립선언, 그리고 3·1독립선언 전제적 군주주의를 극복 국민주권주의 내세워 인류의 자유·평화도 설파 中 5·4운동 등에도 영향 1919년 3·1운동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에서는 국내외 어느 곳이든지 '독립 선언'을 선포했다.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하여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선포한 '2·8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거행한 독립선언,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만주의 지린(吉林)에서 주도한 대한독립선언이 대표적이다. 3·1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들 독립선언은 작성자가 각각 다르지만, 주권 독립과 함께 민주주의에 의한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더 이상 군주를 따르는 신민(臣民)이나 백성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독립을 선포한 것이 3·1운동의 독립선언이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전제적 군주주의를 극복하고 1919년에 이르러 민족의 이름으로 국민주권주의로 새롭게 대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는 한국 역사를 민주주의의 길로 전환시킨 대혁명이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만도 200만명이 넘었던 3·1운동은 신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 종교 간의 차이,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지도자나 주동자도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오직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의 한 뜻, 한마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 결실로서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독립운동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 나갔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의 선각자나 혁명가가 담당하던 독립운동이었지만, 3·1운동을 거치면서 학생과 여성, 농민과 노동자 등이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특히 여성의 참여는 사회 민주화의 진전, 농민과 노동자의 참여는 민족의식의 성숙을 불러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민족 독립을 위해 종교·이념의 차이나 반목을 극복하는 한국민족주의의 특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렇게 민족 통합의 광장을 이루었던 3·1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는 비로소 봉건사회의 구폐(舊弊)를 타파하고 근대화를 진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민족운동이었다. 한국 민족운동의 대하(大河)를 이루는 3·1운동의 또 다른 큰 의미는, 독립선언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반(反)인류적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 수호를 주창하였던 점이다. 이는 한국 독립을 인류 평화의 실현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 설파한 인도주의적 사상으로부터 발현한 것이었다. 이런 3·1운동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자유와 평화로 이어져 있었으며, 한국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주의를 향해 열려있었다. 때문에 3·1운동은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도 주목할 만한 인도주의 운동이었다.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베트남·필리핀·이집트의 민족해방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9-03-05 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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