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 대통령과 '패밀리'의 염치 / 이호선(법) 교수

장면 1.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학교 정문 앞 주차장 공터,좌회전하는 통로에 승용차 하나가 버티고 서있다. 뒤에 차들이 경적을 울리지만 아랑곳하지 않다가 여학생 한 명이 올라타자 그제서야 서서히 자리를 뜬다.

장면 2.강사 한 명을 가운데 두고 학생들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다. 돌아가며 말하는 순서를 갖는데 차례도 아닌 청년이 느닷없이 끼어든다. 몇 번 계속되는 행위에 여학생 하나가 싫은 기색을 한다. 그러자 이번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왜 기분 나쁘게 쳐다보느냐고 을러댄다.

장면 3.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박 회장은 직접 전화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대면하셔서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임검사의 말에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친다. "아뇨,그럴 생각 없습니다. 이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검사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렇다면 영부인께서 받았다고 하는 100만달러의 용처는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피의자입니다. 방어권 차원에서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검찰에서 밝혀내시죠.수사기관은 검찰이지,제가 아니잖아요. "

장면1과 2는 필자가 영국에 있으면서 직접 겪었던 것이고,장면 3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 조사와 관련해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장면 1과 2의 주인공들은 자원은 많지만 그에 걸맞은 국가경쟁력이 빈곤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권 사람들이었다. 근래 들어 법을 사회적 자본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비즈니스 마인드와 리걸 마인드는 다른 게 아니다. 법률위험을 관리하지 못하면 애써 일궈 놓은 경제활동은 한방에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법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은 신뢰이고 예의다. 근사한 말로 예의이고,쉬운 말로 염치다. "법령과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이를 모면할 생각은 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만,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써 이끌면 수치도 알고 격도 갖추게 된다(道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는 공자의 말씀은 염치의 기본이 사라진 사회에서 지불해야할 감시비용의 증가,그로 인한 사회적 및 국가적 경쟁력 저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50년대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도시에 살면서 그 곳 주민들의 삶을 관찰했던 에드워드 밴필드는 '퇴행사회의 도덕적 기초'라는 논문을 통해 오직 가족주의만이 지고의 선이 되는 극한 이기주의 환경을 분석한 바 있다. 그 지역 주민들에게 있어 정의는 '가족의 이익'이었고,패거리를 떠난 전체의 공공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은 우선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해 놓고 판단했다. 그는 이를 '무도덕 가족주의'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구속된 노건평씨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서로 패밀리는 건드리지 말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사법처리의 수순에 접어드는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이를 한낱 소일담으로만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염치부재와 뻔뻔함이 너무 심각하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라도 교육에서는 기본을 가르쳐야 한다. 준법 교육에 앞서 내면의 염치 함양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팍팍하고 고단한 삶에서 모두가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 제대로 된 인성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일정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에게 기업체 입사 등에 가산점을 주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법의 처벌만 면하면 그런대로 인생 잘 사는 줄 아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국가에 경쟁력이나 무슨 희망이 있을 리 없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2069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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