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어머니의 마음으로, 어머니의 손맛으로 '산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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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에 치이는 국민*인들의 식사는 빠르고 간편하며 신속하다. 아침은 편의점의 삼각김밥, 점심은 매점의 라면, 저녁은 각종 배달음식으로 때우기 일쑤다. 자극적인 맛이 침샘을 깨우고 종류도 각양각색, 준비에서부터 먹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30분남짓으로 속전속결이다. 하지만 묻고싶다. "당신의 속은 안녕하신가요? 혹여 더부룩하거나 갑갑하진 않으신가요?" 짜고 기름진 음식들이 매일 들어차는 속에 필요한 건 다름아닌 소박하고 편안한 어머니의 밥상이 아닐런지. 더욱이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고 있는 국민*인이라면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따뜻한 밥상이 간절할 것이다. 그 정겨운 손맛이 그리운 국민*인들을 위해 지금부터 살짝 귀띔해주려 한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 냄새가 익숙한 이 곳, 평창동 골목의 숨은 맛집 '산길'이다.
높은 언덕과 그보다 높은 집들 사이, 작은 골목을 돌아보니 빨간 대문이 눈에 띈다. 대문 중앙의 목각 현판엔 '산길'이란 두 글자가 곧게 박혀있다. 양 옆으로 차곡차곡 쌓인 벽돌담엔 담쟁이가 뻗은 손이 앙증맞다. 잿빛 돌에 고인 물은 썩지 않고 맑아서 물풀을 키워내고, 다육식물이 소복히 담긴 항아리는 햇볕에 흙냄새를 풍기며 익어간다.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빛깔의 꽃들이 도란도란 고개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름 그대로 산길이 따로 없다. 마당 한켠에 누운 넓다란 가마솥을 지나 들어선 가게 안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나무, 항아리, 화초가 즐비하다. 어느 이름모를 산을 툭 떼어다가 가게 안팎에 옮겨놓은듯하다. 이제 바람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상 가득 음식들이 오르길 기다리면 된다.
뚝배기에 육수를 붓고 계란을 톡 까넣은 다음 휘휘 젓는다. 불 위에 올리고 서서히 익힌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계란찜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데 머잖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순식간에 뚝배기 안으로 침입한 국자가 빙글빙글 춤을 춘다. 불길이 거세져도 국자의 춤은 멈출 줄 모른다. 쉼없이 도는 국자를 타고 계란이 익어가며 솟아오른다. 처음엔 미미하던 계란의 움직임이 점차 커지며 이러다 뚝배기 바깥으로 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다행이도 노랗게 익은 계란은 탄력있는 자태를 뽐내며 위로 봉긋하게 부풀어오를 뿐이다. 토실토실한 계란 위로 파와 고춧가루, 깨소금을 뿌려주면 산길만의 특제 계란찜 완성이다. 고소하면서도 짭쪼름한 맛에 탱글탱글한 식감이 더해져 근사한 요리가 된다.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산길에서 '국민대학교 교수님들이 가장 즐겨 찾으시는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교수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콩나물국밥의 매력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우선 얼큰하고 칼칼한 국물을 한 입 후루룩 넘겨주고, 뚝배기 안쪽에 다소곳이 담긴 밥을 살살 풀어준다. 국물을 머금은 밥알과 함께 푸짐하게 들어있는 건더기를 크게 한 술 떠서 입안으로 직행, 마음껏 맛을 만끽하면 된다. 아낌없이 담은 재료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풍성한 맛이 마음까지 덩달아 푸짐하게 만들어주는듯 하다.
순대국은 올 해 새로 등장한 신메뉴다. 신입인 걸 티라도 내는 듯 차림표에도 자리가 없어 벽에 홀로 이름을 내걸고 있다. 산길에서는 깔끔한 맛을 위해 모든 국과 찌개를 다시마 우린 육수로 만들고 있다. 순대국도 마찬가지로 다시마 육수를 사용해 자칫 텁텁할 수 있는 순대의 맛을 가볍게 잡아준다. 솔솔 얹은 들깨가루는 한결 진한 풍미를 선사하고 총총 썰어 넣은 부추는 입속에 향긋함을 심어준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듯 순대국이 산길의 신흥 강자로 자리잡는대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싱싱한 채소와 알찬 속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쌈. 그 중에서도 맛이라면 돼지고기 보쌈이 빠질 수 없다. 산길의 보쌈은 제대로다. 달짝지근한 노란 배추가 탄탄한 몸으로 속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보쌈의 중심인 고기를 보면 먹기 알맞게 익어 살점에서 윤기가 흐른다. 살코기와 비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질좋은 국산 돼지고기이기 때문이다. 아삭아삭한 무말랭이는 매콤달콤한 맛으로 돼지고기를 열심히 보좌한다. 여기에 개운한 맛을 원하면 고추와 마늘을 추가하면 된다.
녹두를 곱게 갈아넣은 반죽이 제법 걸쭉하다. 너른 팬이 뜨겁게 달궈지면 반죽을 올려 동그란 모양으로 펴준다. 고소한 빈대떡 냄새가 지글지글 익는 소리를 타고 주방 밖으로 퍼져나간다. 소리와 냄새로 이미 맛을 본 것만 같은 느낌도 잠시, 상 위에 나타난 위풍당당한 크기에 놀라고 만다. 젓가락을 조심스레 갖다대니 두툼한 반죽이 바삭하고 찢어진다. 맛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야말로 오감으로 먹는 녹두빈대떡이다.
너무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산길의 순두부찌개는 결코 쉽게 나오는 맛이 아니다. 무턱대고 맵지않은 다정한 맛에 따끈한 밥이 절로 생각난다. 맥없이 으스러지지않는 탱탱한 순두부와 빠지면 서운한 계란, 반가운 소고기까지 곁들여져 수저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가장 친근하면서도 특별한 맛이다.
특유의 냄새와 맛을 자랑하는 청국장은 산길에서도 예외없이 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콩을 고르면서부터 불리고 삶고 찧고 띄우기까지 정성으로 담근 메주로 끓인 찌개이니 그 맛이 엄청날 수 밖에. 구수하면서 공들인 시간만큼 맛있고 쏟아부은 시간만큼 배부르다. 구수한 청국장을 밥에 슥슥 비벼서 잘 익은 김치 한 점 올려 먹는 그 맛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상 위에 펼쳐진 많은 음식들 중에 모르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도 친숙해서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고 절로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맛, 그래서 지극히 고마운 맛이었다.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식사가 아닌, 음식에 담긴 정성과 따뜻한 마음을 함께 먹는 시간이었다. 국민*인들이 오면 밥 한 술이라도 더 퍼주고 싶다던 주인장의 말이,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밥상이었다. 어머니의 손맛이, 어머니의 마음이 그리운 국민*인들에게 '산길'로의 나들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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