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아시아경제]무한경쟁, 손잡이 없는 칼 /김도현(경영학전공)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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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기억합니다. 을지로입구 전철역이었습니다. 그 해 봄에도 황사가 불었던지 봄꽃 내음 속에 먼지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거리는 양복 차림의 사람들 물결로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커다란 물결을 바라보면서 저는 문득 부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양복 입은 직장인이라는 이름이 주는 안정감을 제가 가지게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혼자 철없이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대학 3학년 복학생 시절의 기억입니다. 서른이 넘은 다음 단 한 번도 20대로 되돌아가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저의 20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는 사실은 두려움이 되어 희망을 잠식했으니까요. 그 나이가 정말 아름답고 무한한 가능성의 시기라는 것을 그때는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어버리겠다는, 혹은 세상을 다 바꾸어버리겠다는 과장된 객기도 사실 거친 세상에서 밥벌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초조함을 감추려는 안간힘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그나마 사람구실을 하게 된 건 그 20대를 함께 통과해준 벗들과 선후배의 덕임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얼치기 궤변을 견디며 밤새워준 친구들, 손쉽게 절망하지 않도록 손 내밀어준 선배들. 제게 그래서 '대학'이라는 발음은 여전히 눈시울 뜨꺼워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학교 밖의 사회는 물론 학교와 다릅니다. 사회는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으며 개개인의 사정을 살펴주지도 않습니다. 무한경쟁, 생존경쟁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대학이 변화해야 한다고, 무한경쟁에 준비된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도 기꺼이 동의합니다. 거친 곳으로 나아가려면 거친 곳에 적응하도록 준비시켜야 하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고 또 선생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에 대비시키는 방법이 오직 강한 경쟁뿐일까요. 우리 젊음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경쟁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습니다. 이름 대신 등수로, 취미 대신 등급으로, 인품 대신 수능성적으로 분류되어 온 경쟁의 달인들이지요. 이들을 더 심한 경쟁으로 몰아넣어 더 강력한 역량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실 대학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상대평가를 강화하고, 졸업을 위한 각종 요건을 부가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이처럼 학생들에게 냉정한 표정을 지어갑니다. 학생들은 불안할 것이 틀림없을 것임에도 위로해달라는 손짓 대신 '센'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저는 그 '센 척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대학이라는, 사회에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모의실험' 공간에서 우리는 세상이 가혹하다는 것을 물론 분명히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가혹한 세상을 옆 사람들의 손을 잡고 헤쳐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깨 겯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사실 그거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이곳저곳에서 무한경쟁 타령을 듣습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이라는 말은 손잡이가 없는 칼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칼을 쥐고 다른 사람을 찌르려면 스스로 손을 베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그 단어로 상처 입고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 사월이 끔찍하고도 끔찍합니다. 마침내 대학마저 그렇게 되어간다면, 꽃 내음 좋은 봄날 을지로입구역에서 아이처럼 울기나 하는 그런 '경쟁력 없는' 청춘은, 아… 이제 어떻게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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