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사람과 이야기] 예술작품이 된 '꼬방동네'
서울 북악산 산마루에 자리잡은 달동네 '성곽마을'이 환해졌다. 높이 4~5m의 서울성곽(사적 제10호) 아래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난한 동네에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학생 50여명이 찾아와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세운 것이다.

지난 1일 오후 3시쯤,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대학생들이 성곽마을 골목길을 오가며 노란색, 초록색 페인트로 시멘트 벽 가득 비둘기를 그렸다. 시인 김광섭(1906~1977)의 시 '성북동 비둘기'에서 모티브를 딴 것이다.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들도 그려 넣었다. 동네 사람들이 쓰레기장으로 쓰는 공터에는 빨강, 노랑, 보라, 초록색의 플라스틱 비둘기 조형물 48개를 세웠다. 학생들 작업을 구경하던 동네 노인들이 신통한 듯 "아스케끼(아이스크림) 사다 줄까?" "더운데 미숫가루 좀 먹고 하라"고 격려했다. 고추, 상추, 호박을 심은 텃밭 너머에서 누렁이가 컹컹 짖었다.

국민대 학생들은 지난 3월부터 공공미술(거리·광장·공원 등 공공장소를 꾸미는 현대미술) 수업의 일환으로 성곽마을을 단장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변추석(53) 교수는 "공공미술을 가르치려면 특정 지역을 한 곳 정해서 학생들이 직접 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실제로 꾸며보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며 "학교에서 가까운 성곽마을을 택했다"고 했다.


▲ 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성곽마을에서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 자신들의 그림으로
단장한 건물 외벽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학생들은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 "주민들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허락을 받고,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가가호호 찾아가 인생사연을 물었다. 처음엔 "왜 귀찮게 하냐"고 퉁명스레 말문을 닫던 주민들은 학생들에게 차츰 마음을 열었다. 학생들은 현장 조사를 거쳐 지난달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제작해,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초까지 속속 설치했다.

김효성(여·34)씨는 이 마을 최고령인 백발의 김분옥(여·92)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초상화를 그렸다. 김 할머니는 서울성곽을 찾은 행락객에게 음료수와 김밥을 팔며 홀로 3남2녀를 키웠다. 이정은(여·23)씨는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사진 속 노인들이 던진 소박한 한마디를 적어 넣었다. "천재가 있으면 바보가 있고, 부가 있으면 빈이 있고, 이것이 음양의 조화야." "위험할 일이 없어. 훔쳐갈 것이 없으니까. 우리는 문을 다 열어놓고 살아."

일본 유학생 야마다 마미코(여·24)씨는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이 많은 이 마을 특색을 살려 폐지로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매일 오후 공터에 모여 라면박스 뒷면에 그린 윷판에 윷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폐가구를 모아서 윷판 겸용 벤치를 만들어준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오는 19~21일 사진과 동영상, 초상화 등을 노인정에 걸고 동네 주민들을 초대해 조촐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국민대 학생 전우주(여·25)씨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테크닉에 주로 신경을 썼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 보다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주민들도 흐뭇해했다. 하두호(81)씨는 "우중충했던 동네가 밝게 변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 성북동 성곽마을이 국민대 학생들의 공공미술 수업의 일환으로 성곽마을의
담장 곳곳이 그림과 오브제로 채워지면서 동네가 예쁜 미술전시장으로 변하고있다. /이진한 기자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09/20090609020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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