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 국민인!!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힘찬 호흡
2005년 가을 호 『실천문학』188페이지. 가만히 턱을 괸 채 페이지 한 구석을 응시하는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그 시선 끝에 커다랗게 새겨진 두 글자, ‘이하’. 제12회 실천문학 신인상 시 부문으로 등단한 이정하 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당선의 순간.
“이정하 선생님이시죠?”로 시작되는 당선 전화에 ‘이거 큰일났구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는 이 군. 놀라움과 당황, 걱정에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짧은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을 다양한 감정들이 떠오르는 듯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포기하려고 했죠. 취직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배웠던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선 여부에 상관없이 제 모든 작품을 모아 투고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에요. 이를 발판으로 더 좋은 시들을 써나가고 싶습니다.”

촬영장에서 발견한 ‘이 시대의 엑스트라.’
그는 당선작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엑스트라」를 꼽는다. 그 자신이 직접 엑스트라를 하며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쓴 이 작품은 촬영장에서 발견한 ‘이 시대의 엑스트라’를 그리고 있다.
“태풍에 농사를 망치고, 직장에서 잘린 사회의 주변인물들이 그곳에서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어요. ‘만적의 난’ 장면을 찍는데, 50~60대의 할아버지들이 새벽부터 나와서 30시간이 넘도록 엎어지고 무릎까지고 하며 촬영하시는 거예요. 이들이 바로 이 사회의 노비, 만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를 만나다. 시를 쓰다.
사랑시가 시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대학교 1,2학년 시절, 정말 좋아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군에 입대한 그는 그곳에서 신대철(국문)교수의 시집『무인도를 위하여』를 만났다.
“원체 억압받는 것을 싫어하는데다, 최전방에서의 군생활로 숨이 막혀있던 저에겐 그 시들이 저를 호흡하게 하는 방독면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제대하자마자 교수님을 찾아갔죠. 신 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시선.
평소 억압받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 군은 이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 한 해의 휴학기간 동안 공장에서 원단을 나르고, 인권 단체와 집회를 찾아다니며 다른 삶의 모습들을 찾아다닌 것도 바로 이 때문. 대학 졸업 후에는 탈북자 대안학교의 자원교사 활동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할 생각이다.
“신 교수님의 시가 저에게 그랬듯, 저도 사회 변두리의 사람들에게 방독면이 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들과 함께 걸어가며 치열하게 살면 살수록 좋은 시들이 나오겠지요.”

시는 함께 써나가는 것.
졸업을 앞둔 그는 아쉬운 것이 많다. 갑작스레 숨진 단짝친구의 기억이 그의 대학생활 대부분을 방황으로 채워놨기 때문이다. 등단을 통해 그 상처를 승화시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그에게 신인상 당선의 의미는 더욱 크다.
“제 시는 그 친구, 저에게 불씨를 심어준 신대철 교수님, 그 불씨에 기름을 부어준 정선태(국문)교수님, 그리고 방황하던 저를 품어준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써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문단이나 사회에서 많은 어려운 일들과 부딪히겠지만, 이들과 함께 가고 있기에 전 자신감을 잃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회의 엑스트라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갈 그의 미래. 때론 힘들지 몰라도 외롭지는 않을 그의 길이 아름다워 보인다.

 

엑스트라
― 만적의 난
                            이하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 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 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家奴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타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기가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冬天을 가른다.


(발표지 : 『실천문학』 2005년 가을)

이전글 탁광일 (산림자원) 교수 6일 한국캐나다학회 참여
다음글 티셔츠에 그려내는 ‘녹색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