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 국민인!!
디자인 전공 부부가 청학동 서당 훈장 부부가 된 이유는?/강동의(시각디자인 89),안동범(의상디자인 93) 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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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청학동, 풍교헌 서당 강동의·안동범 부부 결혼을 전제로 여자에게 접근하다 맑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출발한 발길이 청학동에 다다르자 오후 세시를 넘기고 있었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계곡길을 거슬러 청학동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풍교헌의 간판이 휘리릭 지나간다. 자동차를 세우고 천천히 ‘빠꾸’를 해서는 풍교헌 앞마당까지 들어간다. 훈장과 그의 아내가 담담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는다. 서당 한 쪽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고, 마당 건너편으로 웅장한 지리산이 세상을 품고 있다. 나는 초면이고 동행한 방송 PD는 구면이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인터뷰를 하자고 들이댄다. “억? 기별도 없이 오셔서 인터뷰를 하자고요?”
CityLife 원래는 계획에 없었어요. 그저 삼성궁이나 걸어다니다 돌아갈 생각이었는고, PD 친구가 인사나 드리고 가자해서 들렸는데, 한옥하며, 지리산 하며, 아이들 하며… 갑자기 인터뷰가 하고싶어지네요. 젊은 부부가 이런 골짜기에 콕 박혀 사시는 게 예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아들만 셋이라고 하던데, 사내 녀석들을 키우기가 만만치 않지요? “하하하, 그렇지 않아요. 애들은 자연이 키워줍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곳에는 우리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 풍교헌에 들어와 사는 아이들이 20여명 더 있어요. 그 아이들도 그저 자연 속에서 자기 스스로 익어가고 있는 거예요. 저희는 아이들이 쉴 공간과, 격식이 필요한 예절과 즐거운 우리 전통을 가르쳐주면 됩니다. 거기에 뒷동산에서 뜯어온 나물과 염분 없는 유기농 식단을 주고 아랫마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또 데려오는 일만 하면 됩니다. 애들이 꾸밈없고, 제 할 일 스스로 잘 하고, 학교 공부도 엄청 잘 하고(훗훗), 잘 먹고 잘 뛰어노니 더 이상 바랄 게 뭐 있겠어요?” CityLife : 훈장님이 수염을 기르시긴 했지만 얼굴이 동안이신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지엄한 훈장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라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젊은 분이 어쩌다 훈장이 되셨는지, 이 멋진 한옥은 또 무슨 돈으로 장만하신건지, 듣자하니 도시 생활도 꽤 하셨던데, 서울이 더 좋지 않았는지… . “아버님(죽헌 강웅위 선생, 수시정 훈장)이 한학자이십니다. 요즘 좀 편찮으셔서 당신 집에만 계십니다만,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한문과 전통을 배웠고, 학교에 가서 의무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더 하기를 바라셨어요. 그래서 청학동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부터는 진주에 나가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CityLife : 한문과 미술은 통하는 데가 있지요? 붓글씨도 배우셨을 테니 어쩐지 전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미술에 소질이 있는지는 저도 몰랐어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은 제 그림만 보시면 감탄을 금치 못하셨어요. 한번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그렸는데, ‘수업시간에 딴 짓 하는 녀석은 뭐냐’며 제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오셔서는 그림을 보시더니 ‘야, 그것 좀 잘 오려서 날 다오, 짜식 그림 잘 그리네!’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미대를 생각했고, 결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를 가게 된 것입니다.” City Life : 결혼 스토리가 재미있던데요?
그의 전략은 ‘교양과목’ 가운데 하나였던 ‘사서삼경’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미 부친으로부터 한문학을 배운 그에게 대학의 교양과목으로서의 사서삼경 정도는 머리속에서 휙휙 돌아가고 있던 터였다. 그는 가끔 결석을 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그녀에게 가서 ‘노트 좀…’하면서 접근했다. 그랬던 그가 시험을 앞두고 예상문제집을 30부 만들어 강의실 동기들에게 쫙 뿌렸다. 물론 아내에게 주기 위해 전 학생에게 돌린 것이다. 부담을 느끼는 순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City Life : 복학생이라고 해 봤자 나이가 20대 중반인데, 그 나이 때는 여자도 많이 사귀어 보고 그럴 때 아닌가요? 굳이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게… “제가 그렇게 배운 것도 있지만, 우리 농촌 현실과 관계된 사연도 있답니다. 사실 나는 미대 들어간 걸 후회하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 동양철학과 한문학을 배운 제게 ‘미술’이란 ‘편협하고 속 좁은 세계’로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교수들도 제가 생각하는 율곡이이나 이황 선생 같은 분들이 아니었어요. 학부 1학년 새내기였던 제 마음 속의 미술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학교 그만 두고 청학동으로 가겠다고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지금 오지 마라… 우리 집안에 대학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다. 중간에 그만 두는 건 이모저모로 옳지 않다. 그리고 나중에 오더라도 장가를 간 다음에 와라. 청학동도 농촌이다. 들어오면 장가 못간다.” “흐흐흐. 대학생이 나 하나라는 것도 좀 찔렸지만, 농촌에 들어가면 장가가기 힘들다는 말씀이 확 다가오더라고요. 그러니 제가 그렇게 서두를 수 밖에요. 아무튼 예상문제집은 완전 적중했고 모두들 제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안동범 씨가 저보고 ‘예상문제집 만들고 프린트 하느라 고생했으니 돈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돈은 필요없고, 그냥 차나 한잔 사시라’고 했습니다.”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남자는 한 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먼발치에 머무는 예절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낌새가 보이면 우연을 가장한 독기 품은 필연적 등장과 동시에 연적을 한방에 날려버리고 빠지는 작전도 계속 구사했다. 여자도 안다. 그 마음을. 여자도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도 그냥 모른 척 놔둬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말 없이 잔잔하게 웃고만 있는 것이다. 폐업 작전과 소중한 귀향 결혼했다.
“어쩌겠어요. 무일푼이 되었고, 서울에서 상업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게 쉽지도 않지만 결코 즐겁지도 않은 것을... 그래서 자연스럽게 청학동 얘기가 나왔고, 뜻밖에 아내가 반갑게 동의해 줬어요. 제가 마눌님 복이 있는 거죠?” 그들은 원래 청학동에 들어와 ‘모종의 다른 일’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서당을 차렸다. 땅은 원래 아버지 소유였다. 디자인은 강동의 씨가 했다. 그리고 목수로 일하는 친구의 ‘현장’에서 스스로 그 일을 하면서 배웠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공간, 학생을 위한 기숙사, 그리고 서당 건물을 지었다. 세 동은 모두 전통 한옥이다. 주방 겸 식당은 양옥으로 했다. 철저한 위생 관리를 위한 일이었다. 서당을 만들면서 부부는 새로운 삶에 대한 벅찬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청학동 아이들은 저 아랫동네에 있는 묵계초등학교를 다닙니다. 그런데 학생 수가 너무 없어서 폐교가 추진되고 있다는 거예요. 전교생이 50명이 안되니까요… 청학동에서 자랐고, 고향에 돌아와 서당을 준비하고 있는 제게는 보통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동네에 젊은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자연히 아이들도 많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서당을 차리면 내가 외부에서 애들 데려오겠다, 그러면 되겠느냐, 한거죠.” 그는 실천했고, 그 결과 묵계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120명으로 늘어났고, 청암중학교 학생의 70%가 서당 학생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빨래하기, 비데 없이 똥 닦는 법을 가르치다 풍교헌은 서당 학생을 스무 명 이상 받지 않는다. 가르치고 먹이는 일의 한계도 있지만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기 프로그램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애들이 입학하면 일단 인성과 예절을 가르치고, 수저 사용법, 혼자서 빨래하기, 비데 없이 깔끔하게 똥 닦는 법 등을 가르친다. 그 과정이 끝나면 서당에서 공부도 시작한다. 한문학만 가르치는 게 아니다. 국어, 영어, 수학도 개인 수준에 맞춰 과외로 가르친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이런 일련의 커리큘럼을 겪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찾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정진하는 습관을 얻는다. 그래서 학교 성적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서당에 돌아와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고 있다. 피아노도 열심히 치고, 주말이면 교복 빨래도 깔끔하게 한다. 훈장 선생님과 학교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지리산 계곡에서 천렵을 즐기며 삶의 가치와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기도 한다. “시골에 머문 사람과 시골로 돌아온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은 도시와 시골을 모두 경험해봐야 유연하게 운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들만 셋인데, 녀석들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고, 어느 날 돌아오거나 또는 돌아오지 않겠지요. 어떤 선택을 하든 저희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들이 자기 삶을 스스로 찾아가고 다듬는 일을 돕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 부부는 이곳 청학동 골짜기에서 그 가치를 찾아먹으며 살랍니다. 지리산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계곡 너머 초록이 조용히 웃고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338456 출처 : 매일경제 기사입력 : 2010.06.28 14:4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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