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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8.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해공 신익희 / 해공 신익희 선생

경성역서 만세운동 주도… 26년만에 해방된 고국 첫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우리가 3·1운동 당시에는 오직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순결하고 숭고한 이상으로… 전 국민이 통일되었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비운에 빠져있는가. 이를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경계하고 반성해야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3·1정신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피란지 부산에서 32돌을 맞은 3·1절 기념식장에서 했던 해공 신익희의 말이다.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판서를 지낸 신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 한학을 배웠던 그는 1908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해 1910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참판의 딸 이승희와 결혼하고 1년 후에 현해탄을 건너 와세다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고학으로 학비를 마련하는 한편 문일평, 안재홍, 송진우 등과 일본 유학생의 통일 단체인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와 회장을 맡으며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창간해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20세가 되던 1913년 윤홍섭, 장덕수 등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힘 쓸 것을 맹세하고,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와 광동강숙을 세우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실력이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일인 교수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신익희는 4학년이던 1917년에 몰래 귀국해 계룡산에 가서 도사 박해봉에게 도술과 차력술을 배웠다. 장래에 무장투쟁을 펼치리라 생각했던 까닭에 졸업을 코앞에 둔 시기에 서둘러 결단한 일이다. 한 학기 내내 강의를 전혀 듣지 않아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우며 공부한 끝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18년에 귀국해 중동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자리를 옮겨 비교헌법과 국제공법을 강의했다. 이때부터 신익희의 활동범위는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최린, 윤홍섭, 송진우, 최남선 등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과 해외의 독립단체들과 연락하여 국내외에서 동시에 궐기할 방법을 논의하고, 11월 말에는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를 무대로 무장 투쟁을 벌이던 홍범도, 김좌진 등을 만나고, 다시 상해로 이동해 신한청년당을 창당해 파리평화회의를 준비하던 여운형, 김규식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다음 2월 중순에 천진, 북경, 심양을 거쳐 귀국했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극심해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를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일이 선결 과제였다. 25세의 청년 신익희는 오산학교 교장이자 예수교 장로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 세계 대세와 우리 민족이 일어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역설했다.

남강은 바로 그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이어 한성기독교청년회 총무 윤치호도 만났으나 때가 아니라며 거절당했다. 그러나 때는 무르익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무오독립선언과 2ㆍ8독립선언이 그것이다. 일본 도쿄에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직은 바로 신익희가 동지들과 만든 학우회였다.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하던 장덕수가 비밀리에 입국해 신익희에게 연락해 왔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만나 만세운동의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3월 4일 경성역에서 수백 명의 2차 시위 행렬을 지휘한 신익희는 체포를 피해 흰 갓을 쓰고 곰방대를 든 농민으로 위장해 용산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삼엄한 검문을 통과해 19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이때부터 1945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고국을 밟지 못하는망명생활이 시작됐다. 3ㆍ1운동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신익희는 이시영, 조소앙과 함께 제정위원으로 참여해 1919년 4월 11일에 임시헌장 10개조를 발표했다. 헌장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다”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선양하고 나아가서는 인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한다”는 임시헌장은 민주국가로서 기본 원칙과 정신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임시정부는 1922년부터 재정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신익희는 의열단 김상옥을 국내로 잠입시키는 일을 주도했다. 1923년 1월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1천여 경찰에 포위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신익희는 중국의 혁명운동을 주목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본토인을 능가하는 회화실력으로 중국의 지방 군벌과 사귀고 국민당 군대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한중합작으로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중 청년 5백명을 모아 분용대라는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1회 졸업한 성주식을 초빙해 훈련 총책을 맡겼다. 이 무렵 중국 혁명을 지원하겠다고 북경에 와 있던 소련 대사 카라한을 만나는 등 외교활동도 동시에 벌였다. 1926년에는 국민당 총통 장개석을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 상황을 알리고 한중합작으로 한만 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신익희는 상해로 달려갔다. 한중이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전선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아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선임됐다.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어 상해사변과 북경사변을 연달아 일으키자 중국도 국공합작으로 일제와 맞섰다. 신익희는 중일전쟁을 기회로 김규식, 김원봉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한 해 동안 황하를 일곱 번이나 건널 정도로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 단체의 연대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 생업에 힘쓰도록 지원하고,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이 무렵부터 일본군대를 탈출한 조선 청년들이 광복군에 참여하기 위해 임정에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8년 의열단 단장을 지낸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9월에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폭격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임정은 이틀이 지난 10일에 대일선전포고를 선언하고 광복군은 항일전에 전면 돌입했다. 신익희는 중경에서도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한중합작을 꾸준하게 추진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43년 12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을 때 장개석의 발의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이 채택될 수 있었다.

1894년 7월 11일 신익희 선생이 태어난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고택.

 

■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다
진공작전에 투입될 날만 기다리던 광복군에게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더 컸다.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선에 참전하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 되었다. 신익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의 자격으로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교섭했다.

그러나 미국은 임시정부는 한국민 전체의 의사로 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받아들이지 않아 중경에서 상해까지 장개석이 제공한 비행기로 이동하고, 상해에서 미군용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12월 1일, 옥구 비행장에 내린 신익희는 고국의 흙에 입을 맞추며 동지들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신익희는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며 이승만과 연합하여 독자적 독립정부 수립의 길을 걸었다. 자유신문을 발행하고 국민대학을 창설했으며,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아 국민체육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해 당선되고,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5년 동안 일했다. 조국 분단은 끝내 민족상잔의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민주주의의 실현과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노정치가 신익희의 최대 과제였다.

1956년 5월 2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신익희는 자유당의 이승만에 맞서 한강 백사장에서 수십만 서울시민들 앞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부르짖어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흘이 지난 5월 5일 호남으로 유세를 가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지면서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그의 대장정은 멈추고 말았다. 해공 신익희가 60 평생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은 민족통일을 통해 이룩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신익회 선생 운구행렬

 

출처: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6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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