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인! 국민인!!

“강직하고 단아한” 한글 이어 한자도…순종 칙서로 만든 ‘한글재민 2.0’ / 김민(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 의대 박재갑·국민대 김민 교수
대한제국 칙서 바탕으로 재민체 개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의미 담은 이름
 한글 바탕으로 한자 4888자 개발ㆍ무료 공개
 정확한 의미 전달 위해 개발 필요성 느껴…
 
“국가의 준엄함 담은 강직한 필체…
허튼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박재갑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김민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팀은 지난해 ‘대한의원개원칙서’의 필체에 기반을 둔 현대적 감성의 폰트인 한글 글꼴 재민체를 개발했다. 이어 올해 한자도 개발, 업그레이드한 버전인 한글재민2.0을 3일 무료로 공개했다. 모든 국민이 ‘재민체’를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진은 한글 글꼴 재민체로 쓴 ‘대한의원개원칙서’.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짐이 생각하건대 국운의 성쇠는 국민의 건강과 질병에 연유함이 많다…”


기품있고, 단아하다.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내 시계탑 건물(옛 대한의원 자리) 1층 로비에 걸린 ‘대한의원개원칙서’(국가등록문화재 제449호). 1908년 10월 24일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내린 칙서에 쓰인 글씨체는 110여년이 지나 디지털 글꼴 ‘재민체(재민체)’로 다시 태어났다.

 

출발은 거창하지 않았다. 국립암센터 초대원장을 지낸 박재갑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건물을 오갈 때 본 칙서 필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칙서의 번역본을 틈틈이 궁서체로 모사했다. 대장암 수술만 7000건을 진행한 ‘암박사’가 수술용 안경을 쓰고 임모(臨慕)하는 모습을 본 김민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가 박 교수의 수월한 ‘붓글씨 연습’을 위해 칙서에 나온 33자 한글을 본따 단순화한 글꼴을 만든 것이 일이 커지게 된 계기였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가여이 여겨 한글을 창제한 것처럼 궁서체에 대고 예스러운 글자를 베껴 쓰는 모습을 가엾게 여긴 거죠.(웃음)” (박재갑 교수) 최근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서 만난 박재갑, 김민 교수는 “33자로 시작해 1년에 걸쳐 한글 글꼴 2350자를 개발해 지난해 한글날 공개했고, 이 한글에 기반해 일 년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KS 표준한자 4888자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3일 무료로 공개된 ‘한글재민 2.0’. 글꼴의 이름은 박 교수와 김 교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왔고, 주권재민(主權在民)에서도 착안했다. 박 교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정신을 이어 한글의 주인도 국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한글재민2.0은 “‘개원칙서’ 원본을 재해석해 현대화, 디지털화한 글꼴”이다. 지난해 ‘한글재민’ 개발 이후 박 교수와 김 교수 팀은 한자 재민체 개발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재민체가 국한문혼용 칙서의 사자관(寫字官)체에서 탄생한 만큼 한글과 동일한 한자가 당연히 개발돼야 한다”는 인식이 따라왔다.

 

특히 김 교수는 “우리말 어휘의 약 70%는 한자인 만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글과 한자 병기가 필요할 때가 많다”며 “동음이의어나 지명, 인명 등의 고유명사는 한글 표기만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 도리어 한글의 의미가 다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기를 하는 경우가 점차 줄고 있지만, 한자는 우리말의 기초가 된다고 판단했다”고 한자 글꼴 개발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그는 “한 벌의 디지털 폰트가 완성되기 위해선 한글, 한자, 영자, 숫자, 문장부호가 일관성을 갖춰야 하는데, 기존 대부분의 폰트는 한자가 제외돼 한글 글꼴과 맞지 않아 이질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9년 기준 국내에 공개된 디지털 글꼴은 6693개나 되지만, 2000년대 이후 개발 글꼴 중 한자와 한자가 같은 서체인 글꼴은 드물다. ‘한글재민 2.0’은 1990년대 초창기 개발된 명조체, 고딕체 이후 한글, 한자의 짝을 맞추며 디지털 글꼴에 새 전기를 열었다.

 

박재갑 서울대 명예교수 [연합]


‘재민한자’는 개원칙서에서 123자, 국한문혼용 외교문서에서 176자를 발췌해 한자 글꼴 기본 구조를 설계하고, 중국 서체 등을 참고해 한글 재민체와 잘 어우러지는 글꼴로 만들었다. 글꼴 개발의 세부 작업을 진행한 이규선 박사는 “한글 재민체에서 모든 부분을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ㄴ(니은)자를 乙(을)자의 하단으로 맞추는 등 한글에서 발췌한 부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자에는 있고 한글에는 없는 요소, 반대로 한글에는 있고 한자에는 없는 요소가 있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자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는 글꼴로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완성된 한글재민 2.0은 일관된 조형적 특성을 가진다. 가로획은 ‘5도 기울기’를 유지하고 있고, 세로획은 ‘수직’을 지키고 있다. 김 교수는 “황제의 명을 받아 공식 문서를 쓰는 사자관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칙서에 나오는 사자관체는 5도 정도 올라간 것을 특징으로 한다. 날렵하면서도 강직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문서인 만큼 기개가 살아있다. 재민체에서도 이러한 조형적 특징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 ㅅ, ㅈ 등의 자음이 세로획 ㅓ, ㅕ와 만날 때 우측 획을 아래로 내리는 모습도 한글 재민체의 특징이다. 재민체 글꼴 개발을 총괄한 박윤정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는 “칙서에선 이러한 자음 뒤 ㅓ, ㅕ가 오면 충돌이 될 수 있으니 내리는 획을 지혜롭게 굴린 것으로 추측된다”며 “재민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굉장한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재민체의 정체성’은 ‘民(백성 민)’자에 숨겨뒀다. 일반적인 ‘백성 민’자와 달리 “우측 획을 네모 안에 찔러넣은 형태”다. 본래 ‘백성 민’자는 날카로운 무기로 사람(포로)의 왼쪽 눈을 찌르는 모습을 본뜬 데에서 유래한 글자다. 김 교수는 “이 글자에는 백성을 하대하고 수동적 존재로 인식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며 “이와 달리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애민사상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백성 민’ 자의 유래를 가져와 역으로 의미를 숨겨뒀다”고 말했다. 글꼴의 이름부터 정체성까지 “국민에게 있는 서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역질 관련 영조 윤음(英祖 癘疫 綸音)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제공]


한글재민2.0의 공개에 맞춰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에선 ‘함께 쓰기 - 한글과 한자, 개원칙서에서 한글재민2.0으로’(12월 14일까지) 특별전도 열고 있다. 전시에선 대한의원개원칙서의 한글과 한문을 재민체로 쓴 작품, 삼일독립선언서 원문과 번역본을 각각 재민체로 쓴 작품, 대한민국임시헌장 원문을 재민체로 쓴 작품 등 9점이 전시된다. 모두 박 교수가 쓴 작품이다. ‘한글재민’ 프로젝트도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현재 대법원 임명 한자 8279자를 추가로 개발, 내년 5월 전시를 열 계획이다. 새로운 한자가 추가되면 “현존하는 글꼴 중 한글과 함께 쓰는 가장 많은 한자를 가진 최고 스펙의 글꼴”이 된다. 재민체엔 그만큼의 희소가치도 부여된다.

 

‘외유내강’의 힘을 담은 재민체에 대해 김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까칠하지만 단아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준엄함이 들어있는 사자관의 필체인 만큼 재민체를 쓰면서 허튼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지 않겠냐”며 “공개된 글꼴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이지만, 나라의 강직한 기개가 담겼다는 것을 느끼며 진지하고 진중한 이야기에도 많이 쓰이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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