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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힘든 삶, 하이든을 생각하다/김대환(관현악전공) 교수

좋아하는 작곡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대답하기는 난감하다. 바흐의 음악을 한결 같이 좋아하지만 눈으로 온 세상이 소복이 덮인 날에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한없이 마음이 쏠리고,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가을날만큼은 슈만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경하는 작곡가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하이든과 브람스'라고 대답한다. 특히 하이든은 그 인품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30여 년에 걸쳐 남의 하인 위치에서 존경 받는 음악인이 되었기에 우리 삶의 지표가 될 만하다.

오스트리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어릴 적 음악적 재능을 보여 성 슈테판 대성당의 소년합창단원이 되었다. 그러나 17세에 변성기로 인해 합창단을 떠나야만 했고 그 후 10년 동안 가난한 음악인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 레슨을 하거나 남의 담벼락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며 생활했으니 그의 20대는 무척 고단한 삶이었다.

하이든은 27세가 되어서야 모르친 백작 집안의 궁정악장이 되어 첫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백작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다시 실직자가 되었으나 다행히 재능을 알아본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에 취직했다. 당시의 일반 음악가들처럼 하인과 다름없는 대우의 계약서에 기꺼이 사인했기에 고용주가 식사할 때 곁에 서있는 일도 감수해야 했다.


1년 후 안톤 에스테르하지가 죽고 음악을 좋아하는 니콜라스 에스테르하지가 고용주가 되었다. 니콜라스 후작은 음악회와 연회를 자주 열었고 하이든은 밤낮 없이 작품을 만들거나 연주를 해야 했다. 열성적인 후작의 요구에 순응하는 대신 하이든은 실력 있는 악단으로 여러 작곡기법을 실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허락 없이는 다른 지역 방문도 금지된 계약에 묶인 삶이었다. 다소 고립된 에스터하차 궁의 생활은 하이든에게는 비평가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생활의 답답함도 주었다. 게다가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 탓에 단원들 간에도 불화가 잦았다. 휴가가 몇 달씩 미루어진 1772년에는 그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하이든은 끊임없이 음악회를 여는 후작에게 항의하거나 단원들을 억누르는 대신 <고별 교향곡>을 작곡, 우회적으로 마음을 전해 자연스레 휴가를 얻어냈다. 무슨 일이든 유머로 풀어내는 하이든다운 묘안이었다. 한껏 멋 부리고 음악회에 참석해서는 정작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조는 귀족 여인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놀람 교향곡>을 작곡해 연주, 졸던 여인들을 당황케 한 그가 아닌가.

단원들을 가족처럼 챙겨 얻은'파파 하이든'이란 별명다운 성품과,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의 기틀을 확립한 실력이 어우러져 하이든은 말년에 유럽 전역에서 존경 받는 인사가 되었다. 외부인들을 위한 작곡도 많이 했는데, 에르되디 백작의 의뢰로 작곡한 현악사중주 <황제>는 현재 독일 국가로 울려 퍼지고 있다.

하이든은 29세에 에스테르하지 가문과 처음 계약할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을 30여 년에 걸쳐 한걸음씩 해냈다. 20대 후반에야 첫 교향곡을 작곡한 하이든이 훗날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릴 것을 짐작이나 했을지. 그가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산 젊은 시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0대의 하이든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이여, 이제 30년 뒤를 생각하며 희망차게 새해 첫 발을 내딛자.

원문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012/h20101231210117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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