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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에게 반해 버렸어요'라고 말하면 다양한 반응이 돌아옵니다. 자신도 강수지를 좋아한다던 선배 교수님도 계셨고 언제 수지로 이사 갔느냐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반응은 '어머, 교수님 주책이시네요'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빠져 버린
대상은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우 배수지, 아니 그가 연기한 극중 인물 서연입니다. 영화를 보고 한 달 남짓 지났는데도 가끔씩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니 제 상태는 중증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체험과 놀랄 만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답십리에서 태어났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행정구역상 서울이기는 해도 궁벽하기 짝이 없던
동네에서 자란 제게 세상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자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한 여자를 '발견'하고 맙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통과의례이며,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종의 성장 과정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땐 이런 설명 따위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부유한 배경을 지닌 그녀-주변엔
압서방(영화에서 압구정ㆍ서초ㆍ방배를 이렇게 부른다고 하더군요)에 사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오빠들이 왜 그리 많던지요-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열등감을 어쩌지 못해 극단적인 자기비하와 말도 안 되는 과잉행동의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안정된
모습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여주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자기확신이 없으니 그녀를 잡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무엇보다 그 불안감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혼자 생각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안착해서 밥은 먹고 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요. 영화
'건축학개론'은 저와 몹시도 닮은(물론 외모는 훨씬 더 잘생긴) 스무살짜리 남자를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 유난히 심하게 앓았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경험이 사실 꽤 많은 사람이
겪은 보편적 체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연대감이 밀려왔습니다. 무뚝뚝하게만 보여 차마 말 걸지 못했던 위층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오직 성공에 목매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직장동료의 마음 속에도 사랑의 열병으로 인한 화인이 하나쯤 꼭꼭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또 권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그 시절, 개론 수업을 듣던
시절을 흔들어 깨워 보고 싶었으니까요. 올해를 선거의 해라고 합니다. 이미 총선은 치렀고 이제 좀 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각 당은 공약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정치공학적 고민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각 정치세력과 언론이 요즈음 만들어내는 말끝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말에 찔려 아플 겁니다. 정치권뿐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냉정한 표정을 연습합니다. 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의 냉혹함을 인정하고 견디게 되는 과정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때때로 우리가 개론
수업을 듣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수룩하고 어리석었으나 옆 사람의 손을 잡으려 애쓰던 그런 날들
말입니다. 때마침 봄이지 않습니까?
원문보기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4261113145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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