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국경제][시론] '朴-文 대결' 정치의 늪 벗어나라/조중빈(정치외교학과) 교수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정치쇄신’ 네 글자를 던지고 또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말이 조심스러운데 이 네 글자는 적어도 12월18일까지는 박근혜-문재인 후보에게 부적처럼 붙어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당당하게 양대 정당의 후보로 뽑힌 두 사람이 ‘무소속 안철수’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장외로 나간 사람을 받들어 모시는 경쟁이 그렇게 치열했던 것일까? 이런 속에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두 후보가 정책경쟁을 한다지만 결국은 둘 다 ‘때리고 퍼주기’에 열을 올리고 ‘정치쇄신’ 앞에서는 매우 겸손한 척 하다가도 뒤돌아서면 곧장 ‘박정희의 딸’과 ‘노빠’의 격돌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과 2012년을 연결짓는다는 것이 자칫 본전도 못 찾을 것을 뻔히 알지만 해 보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정치가 늪 속에 빠져있는 것은 확실한데 무슨 늪인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늪이 늪인 줄 모를 정도가 되려면 오륙십 년은 걸리지 않겠는가 하는 가정을 해 본다. 마침 박 후보도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한 마당이지 않은가. 박 후보가 아는 만큼 어렵사리 사과했는데, 좀 다른 각도에서 ‘박정희 유산’이 현재의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우리가 늪을 탈출하는 발판을 마련해야 할 때다.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늪의 이름은 ‘살고 보자’다. 박 대통령 시절의 ‘잘 살아보세’라는 말을 기억한다. 사람이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아름다운 일이고 늘 감동적이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힘쓴 덕분에 지금 우리는 과연 ‘잘’살고 있는가? 역설적이지만 국민소득 2만달러로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잘살아보세’가 아무리 선한 동기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독재를 만나면 곧 ‘(일단 나는) 살고 보자’가 된다. 그래서 지금은 물질적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되고, ‘나 위주’ ‘우리끼리’ 의식이 팽배해졌다. 지금 사는 것을 잘살아야지 살고나서 그 다음에 볼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의 늪’의 또 다른 측면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단 살고 보면 행복이 뒤따를 것’이라는 신념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데 있다. 이렇게 되면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판을 치는데 개화파, 산업화, 세계화 세력이 무한경쟁체제의 수호자로 자임하고 나선다. 물론 이런 체제는 억울한 사람을 부지기수로 양산하고 이들이 그런 마음을 먹든 말든 ‘체제전복’ 세력으로 분류된다. ‘박정희의 딸’이 전자의 상징이고 ‘노빠’가 후자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노빠’도 박정희의 유산을 받은 것이 된다. ‘전복’이든 아니든 체제적 사고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우선 퍼주기식 복지에 매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권만 유산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시민도 받는다. 일단은 공부를 잘해야지, 일단은 돈이 있어야지, 일단 얼굴은 좀 돼야지 등…. ‘일단’ 챙길 일이 무한대로 늘어나는데 이것이 다 ‘살고 보자’와 연결된다. 공부 잘하자는 일이 나쁠 게 뭐 있나. 그러나 ‘일단은’이 들어가면 잠도 재우면 안 되고 놀려도 안 된다. ‘일단은 알을 낳아야’하는 양계장의 닭 신세와 다르지 않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기회가 그만큼 적어졌다.

여기서 ‘안철수’도 모르는 ‘안철수’가 유령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국민의 기대가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왜 ‘정치쇄신’이냐고? 기성의 정치권은 아무리 화장하고 변장을 해도 ‘살고 보자’도 아니고 ‘나부터 살고 보자’고 하는 민낯이 훤히 보이니까 그렇다. 이러고 보면 ‘정치쇄신’이 민생이고 이것은 ‘사람쇄신’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데 남은 기간에 정책은 고사하고 후보자들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 좀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람을 보면 지도자의 정책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112734741

출처 : 한국경제 기사보도  2012.11.2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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