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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내 브로치 모조품이 ‘남대문 티파니’로 통한대요, 기분 나쁘진 않네요/김승희(금속공예학과) 명예교수
차가운 금속을 우리 산수로 풀고 또 풀어내는 작업. 올해로 서른일곱 해째, 김승희(66) 작가가 걸어온 길이다.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로 36년간 재직한 뒤 지난해 8월 정년 퇴임한 그는

1~2m짜리 대형 금속 공예가로 유명하다. 세간에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진 건 ‘김승희 브로치’를 통해서다. “눈 밝은 사모님들 사이에선 ‘김승희 브로치’ 하나쯤 있어야 ‘안목 있다’는 말을 듣는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훈정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연장을 든 ‘현역 작가’였다. “공예를 더 젊은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에게 ‘한국적 산수를 품은 브로치’ 얘길 들었다.

김승희 작가의 작품이 입소문이 난 건 1980년대부터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연마하고 돌아온 몇년 뒤다.

“서울의 한 유명 호텔 아케이드에 있는 보석상에서 부탁을 받았어요. 한국 전통 식기 특별전 의뢰였죠. ‘5월의 만찬’이란 주제로 반상기·구절판·찜기·촛대·은수저 등을 제작해 내놨죠.” 83년의 일이다. 작가의 작품이니 평범한 모두가 소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단다.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계층이 고객이 됐다. “청와대의 연락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다. 그렇게 ‘사모님’들 위주로 ‘김승희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 작가는 “은수저 등을 만들며 미국 유학 시절의 ‘황당함’이 떠올랐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학에선 디자인만 하고 제작 같은 것은 청계천 대장장이를 찾아 가서 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망치 들고 금속을 연마해 직접 두드려 만드는 것 말이죠. 그런데 인디애나 대학원에선 2㎏짜리 망치를 쥐어주면서 직접 작업하는 방법을 가르치더군요. ‘여기까지 와서 내가 왜 이런 험한 일을 해야 하나’ 싶었죠. 한데 나중에 실제 작업에선 그때 받았던 교육이 큰 도움이 됐어요.”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 교수로, 생활 공예 제작자로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주문은 밀려들고 작업은 많아졌죠. 그래서 아예 은기 공방을 차렸어요.” 생활 공예로 상업화에 성공했지만 그는 여전히 순수 예술가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87년 ‘하염없는 생각’이란 주제로 작품전을 연 그는 “그릇을 하도 만들다 보니 ‘밑 빠진 그릇’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웃었다. 실제 이 전시에서 선뵌 것은 단지 모양을 한 브로치였다. 진짜 단지라면 밑이 막혀 있었겠지만 그는 액세서리 브로치를 밑 빠진 단지 모양으로 제작했다. “은기도, 금속 공예 작품도 실제로 전시를 구경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소수였죠. 전시 공간도 몇 없었고요. 은기 고객들이 이 브로치를 알아보고 하나 둘씩 주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유행이 시작되자 남대문 액세서리 상가에선 제 작품을 그대로 베낀 게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요. 제 작품이 ‘남대문의 티파니’라고 불린다니까요. 요즘 작품들도 여전히 복제한 제품이 많이 팔린다고 하대요.” 그의 작품이 은으로 돼 있다면 남대문 버전은 주석이나 도금으로 돼 있다. 가격은 100분의 1 수준이다. “모조품이 신경 쓰이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다른 걸요. 그리고 얼마나 잘 만들어내는지 몰라요. 인기 있다니까 뭐. 하하."

은을 연마해 예술적으로 변신한 브로치는 이후 오닉스, 호박 등 귀금속 소재 브로치로도 발전했다. 미술평론가 이재언씨는 김 작가의 브로치를 두고 “시적이고 풍경적인 조각으로 금속 조형을 해 왔던 작가의 ‘미니어처 조각’”이라고 표현했다. 마치 한 점의 작은 동양화가 그려진 듯한 그의 브로치에 대한 평이다. 김 작가는 “평론가들이 ‘내 가슴에 꽂는 산수’라고 표현하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산과 자연을 소재로 삼았던 조각 작품이 브로치란 영역으로까지 넓어진 거니까요. 가슴 한 켠에 달려 있는 자연, 우리 산수라는 표현이 정말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김 작가는 여성들이 브로치를 활용할 때 “이야기가 있는 상징물임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브로치만 300개를 넘게 가졌다고 해요. 그리고 그날 그날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맞춰서 브로치를 활용했다고 하죠. 브로치는 그런 장신구예요. 작은 데도 크게 눈에 띄는 소품이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어떻게 드러내고 싶은지 고려해서 브로치를 선택하고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아이디어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작품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동떨어져 존재할 땐 가치가 없어요. 사람들이 즐기고 느끼고 해야 생명을 얻는 거죠. 작품은 작가 마음대로 하면 되지만 장신구는 사용자의 요구도 파악해야 하고 제대로 옷에 달려야 하는 기능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죠. 오히려 큰 금속 공예 작품보다 브로치 같은 장신구가 더 어렵단 말이에요. 요즘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겠다 하고 금속공예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주고도 싶어요. 그래서 차근차근 젊은 세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새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구체화되면 더 많이 알려야겠죠.”

그는 “아직 준비 중”이라고 했지만 벌써 그의 작업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엔 신진 금속 공예가들을 위한 무료 공방이 마련돼 있다. 그곳에는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 세계를 닦아가려는 신진 작가들과, 이들의 작업을 도와주는 김승희 공방 장인들의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다.

원문보기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3/01/04/9941856.html?cloc=olink|article|default

출처 : 중앙일보 기사보도 2013.01.0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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