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겨레]아이들 키우는 밥 같은 놀이터들 / 이상환 (시각디자인 90) 동문

한파가 매서운 올겨울 밖으로 뛰어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른들의 놀이를 주로 다뤘던 지면을 긴 겨울방학을 살뜰히 채우고픈 아이들에게 양보했다. 만연한 선행학습과 주입식 교육의 악다구니를 피해 용케 버텨내고 있는 어린이 놀이 공간들을 찾아봤다.

장난감 없이 사람이랑 노는 아이들

“이야, 그때 왔던 못생긴 아저씨잖아!” 1월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오방놀이터’. 사진부 정용일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블록을 쌓던 아이들이 손을 멈추고 다짜고짜 알은척을 한다. 초면에 어느새 기자는 ‘전에 봤던 그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아저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치고받다 보니 기자 아저씨도 어느새 놀이에 섞여들었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밖에서 온 사람을 받아들였다. 오방놀이터의 넓은 마루에는 별다른 장난감이 없다. 나무 블록, 스케치북과 색연필, 동화책 따위가 벽 한쪽을 채우고 있다. 나머지는 허허벌판이라고 할 만큼 빈 공간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장난감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실컷 놀다 보니 어느새 밥때다. 작은 그릇에 아이들 각자 몫의 반찬이 소복하게 담겼다. “식판에 주면 주는 사람은 편하겠지만 그게 밥을 먹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잖아요.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려면 밥상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방놀이터 박정이 대표는 아이들이 낮 시간에 부모와 떨어져 있지만 어릴 때부터 식탁에서만큼은 대접받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매번 식사를 차린다고 한다.

오방놀이터는 1층 카페와 2층 ‘방과후 놀이터’로 운영된다. 1층 카페에선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맞벌이 부모를 둔 아이 혹은 한부모·조손 가정 아이는 방과후 놀이터를 찾는다. 아이들이 집 대신 안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이다. 1층이나 2층이나 아이들로 북적여도 장난감이 많지 않다. 놀이감 때문에 오히려 경쟁이 싹튼다는 것이 박정이 대표의 생각이다. “잘되는 키즈 카페 여러 곳을 가봤어요. 재미있는 장난감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놀자니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아이들 사이에 긴장이 흐르고 경쟁이 생기죠. 부모들은 싸움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고….” 장난감을 치웠더니 처음에는 “여기서 뭐하고 노냐”고 묻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스스로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이들이 처음 만나도 어우러져서 잘 놀아요. 놀려고 왔으니까요. 아이들이 다음에 다시 오면 ‘그때 그 장난감 어딨어?’라고 묻는 게 아니라 ‘그때 그 친구 어딨어?’라고 묻죠.”


그러므로 월~금요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2층의 아이들에게도 겨울방학이라고 특별히 내세우는 프로그램이 없다. 오방놀이터의 운영 원칙은 단 하나다. 아이들을 무조건, 더 많이 잘 놀게 하는 것. 방학인 요즘은 오전 시간에는 학교 숙제를 마치도록 하고 오후에는 완전히 놀도록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무조건 나간다. 동네 산책을 하거나, 박물관을 찾는 식이다.

미술 교육 통해 공동체 배우는 놀이 공간

그럼에도 방학만큼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다면 어린이를 위한 예술 체험 공간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1월2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상가 4층에는 조그만 학교가 열렸다. 사단법인 커뮤니티디자인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키득키득 어린이 창조학교’는 미술 교육을 통해 공간을 이해하고 공동체의 개념을 배우는 놀이 공간이다. 처음에는 ‘내 것’만 만들 줄 알던 아이들이 몇 번의 수업을 거치자 서로의 작품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내고, 협동해서 커다란 공동 작품을 만들어내는 등 찰흙을 조몰락거리며 ‘함께’의 개념을 익혀나간다.

수업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목마름에서 출발했다. 7살 이준과 4살 이현의 어머니이기도 한 키득키득 어린이 창조학교 정혜진 원장은 미술 교육에 관심이 많아 아들 이준을 유명하다는 이런저런 학원에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었다. 프랜차이즈화해 체인을 늘리는 데만 골몰하는 학원도 있었고, 퍼포먼스와 미술을 결합해 아이들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는 한 프로그램을 들었을 때는 아이가 끊임없이 자극에 노출되는 것이 겁이나 그만뒀다. “아이들 교육비가 여타 학원에서 물질적으로 산출되는 것도 싫었고, 아이가 반복된 자극을 받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것도 난감했어요. 무엇보다 가장 곤란했던 것은 아이들의 작품에 선생님이 간섭을 하잖아요. 선생님을 통해 ‘잘 만든 작품’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나중에는 아이들이 안 보고도 물체에 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외워서 그려요. 애초에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목적을 잃는 거예요.”

결국 미술 교육에 뿌리내린 주입식 교육 방식을 피해가려다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막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니 예전에 아이를 이 학원 저 학원에 돌리던 자신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한번은 4살 아이들 5명을 데리고 한 반을 만들겠다고 찾아온 어머니들이 계셨어요. 그런데 차마 받지를 못했어요. 너무 어려서 수업이 힘들고 진행이 안 되는 건 둘째치고, 무언가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죠. 소근육 발달 등으로 포장해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선전일 뿐이죠.”

정 원장은 아이들에게 놀이에서마저 정답을 강요하는 교육 방식이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1년간 운영하며 지켜보니 유독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무엇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고민이 깊어요. 잘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러니 재미를 못 느끼고 금세 그만둬요.” 아이들은 날이 좋으면 밖에 나가 도시에 숨겨진 디자인 오브제들을 직접 채집하기도 한단다. 박물관에 가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성북구 장수마을 등에 찾아가 그려진 벽화 따위를 보고 공공에 실현된 미술을 직접 바라보며 누군가 이 마을에 찾아와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을 깨친다.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동체란 무엇인지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을 것이다.

프로그램 참여 않더라도 누구든 와서 놀자

서울 관악구 은천동 옛 주민센터 자리는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로 다시 태어났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 하는 예술 체험 공간이다. 엄마들을 위한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료로 운영되고 대부분 일회성 체험 교육이다. 춤·음악·미술 등 다양한 영역을 두루 겪어보며 아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을 수 있다.

한쪽에서 악기 뚱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음악 체험 ‘사랑스럽게 연주하다’에 참여 중인 아이들이 악기를 나눠가지고 미하엘리스의 <숲 속의 대장간> 음에 맞춰 칠판에 그려진 파트별 그림을 보며 이런저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탬버린, 실로폰, 작은북 등 각자의 역할에 열심이었을 뿐인데 하나의 화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이들은 신기하다. 40분 동안 연습을 하고 마지막 10분 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불러 작은 공연을 열었다. 아이들은 공연을 마치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 번 더”를 합창했다.

방학을 맞아 마련한 기획 전시 ‘움직이는 방’은 1월3일 첫 관객을 맞았다. 까만 방에 몇몇 아이들이 발을 들였다. 들어서니 바닥에는 흰 공이 가득 차 있고, 천장에는 색색의 빛이 매달려 있다. 벽에는 다양한 색으로 칠한 그림들이 시간을 두고 바뀌어 나타난다. 손전등을 하나씩 손에 쥔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 이곳저곳 빛을 비춰본다. 어두운 방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깥쪽 화장실에 걸린 그림과 설치물들을 빛을 비추며 살펴본다. 공간을 연출한 프로젝트팀 하이브의 조용준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공간을 변형해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상상해볼 수 있는 매개를 마련했어요. 전시 공간 중 화장실을 포함한 것은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서였죠. 생각의 자유를 한정짓는 것을 넘어보려고 했어요.”

미리 등록한 겨울방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는 이름 그대로 놀이터다. 매니저 나희영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든 와서 놀 수 있어요. 읽고 싶은 책을 읽어도 되고 상설 운영하는 창작공방에서 소품들을 만들어볼 수도 있고요. 학교가 근처에 있어서 학기 중에는 아이들이 이 공간을 카페처럼 이용하기도 해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 가기도 하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한두 시간을 보내다 가기도 하고요.”

책 읽기의 유혹도 아이들을 기다려

책 읽기의 유혹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강좌, 10대를 위한 고전 읽기 등의 수업을 해오던 수유너머에서는 1∼2월 ‘토요서당’을 열고 아이들과 논어와 고전을 읽는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2시간30분씩 수업한다. <홍길동전> <유충렬전>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을 2주일에 한 권씩 읽는 것이 목표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동네책방 개똥이네 책놀이터에서는 연날리기 놀이, 만화 교실, 동네책방 영화관, 그림책 듣기, 생활한복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해뒀다.

원문보기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6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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