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기고] 김정은의 북한, 변화는 시작됐다 / 안드레이 란코프(교양과정부) 교수
최근 북한에서 나오는 소식을 분석해 보면 마침내 김정은 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18일 '원수' 칭호를 받음으로써 김정은은 집권을 위한 과도기를 끝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시대의 경향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는 김정일 시대의 노선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7일 김정은이 관람한 모란봉악단의 시범 공연은 평양에서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파격적인 의상의 미인들이 미국 히트곡을 연주했고,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같은 미국 만화 주인공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미국의 대중문화를 맹비난했던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이런 공연을 관람한 것은 서양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라는 신호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김정은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고 유치원도 시찰한 미모의 부인이 등장한 것도 중요하다. 이는 부인과 공개적으로 동석한 적이 거의 없는 김일성 시대나 개인 생활을 절대 비밀로 여겼던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옛 소련 출신인 필자는 이런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소련 역사를 떠올린다. 소련에서 처음으로 부인과 함께 나타난 지도자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흐루쇼프 총비서였다. 자유화와 개혁을 추진한 고르바초프만큼 부인의 모습을 많이 공개한 소련 지도자는 없었다. 국민 앞에 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는 '신(神)'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인다.

농업정책도 변화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가족 중심 농업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분조(分組)의 규모를 줄이고 토지와 농기구를 가족 단위로 나눠준다면 1970년대 말 중국의 개혁 시작을 연상시키게 한다. 또 경제관리 방식도 달라질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주재 외교관이나 기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도시 분위기도 풀려나가고 있다. 패션 바지를 입고 금 귀걸이나 목걸이를 착용하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정치적인 의미가 별로 없는 상징적인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물론 현 단계에서 김정은은 전략적인 문제에 대해서 원로들의 의견에 도전할 자격은 아직 없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공연을 볼지, 공연에서 무슨 음악을 연주할지에 대해선 결정할 권한이 있다. '상징적'이며 '주변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 그리고 변화에 대한 계획을 통해서 젊은 통치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정은 시대의 첫 번째 숙청이라고 할 리영호의 해임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리영호의 해임은 원로들 내부에서 강경파 대 실용파의 갈등과 연결된 사건으로 해석되지만, 강경파의 핵심 인물로 알려진 리영호의 숙청은 변화의 길을 막던 장애물을 없앤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김정은은 원수 칭호를 받음으로써 수구파의 온상인 인민군을 보다 더 강력하게 통제할 기회를 얻었다.

김정은은 정말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북한을 공부한 지 25년 된 필자는 그동안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감의 상승과 추락을 많이 겪어왔다.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엘리트는 개혁이 초래할 불안정에 대한 공포가 심하기 때문에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김정은 역시 개혁을 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권좌에 오른 뒤, 놀랍게도 그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신호가 분명히 감지됐다. 그것이 바람직한 변화가 될지, 나아가 체계적인 개혁 프로그램의 기반이 될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평양발(發)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느낌만큼은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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