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 (11) 삶은 라면 / 조현신, 반영환(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ㆍ라면 봉지 색깔에 담긴 상징

한국 최초의 라면은 1963년 고 전중윤 회장이 일본 명성식품의 기술지원, 한국 정부의 국민영양 정책 보조금, 배가 고파도 낯설어서 남아돌던 미국 원조품인 밀가루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삼양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미군이 남긴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 죽이 5원, 커피가 25원 하던 때 중량 100g에 가격 10원. 일부러 일본 라면보다 몇 배나 높였던 지방 함유율은 가난한 한국인의 허약한 몸을 암시하는 눈물 나는 지표이기도 했다. 기름에 면을 튀길 때 면적을 넓게 하고, 작은 부피에 긴 면을 위해 구부렸으며, 색이 노란 것은 비타민과 여타 영양제 때문이라고 한다. 면을 다 펴면 거의 50m가 된다. 현재 한국인은 연평균 74.1개의 라면을 먹는데, 1인당 세계 최대의 라면 소비율이다.

미각은 보는 맛, 씹는 맛, 씹는 소리, 냄새 등과 함께 다가온다. 그것도 다른 감각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것들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면서 느껴지기에 미각은 가장 바꾸기 힘든 원초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배고픔 또한 생물학적인 현상이지만 먹는 행위와 결합된 시간과 장소들, 사건과 함께 ‘그 맛’은 수많은 서사의 기억으로 우리의 몸에 쌓여간다. 한국의 대표 인스턴트 식품 라면은 한국인들의 ‘맛과 삶’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음식일 것이다.

■ 전통적인 정서의 포장들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포장은 닭고기 국물 맛을 낸 일본의 ‘치킨라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닭의 통통한 몸통을 통해 면이 보인다. 이국적인 연노란색 꼬불꼬불한 면들이 서로 달라붙은 채 하나씩 밀봉된 이 포장은, 돌이켜 보면 앞으로 이루어야 할 압축적 경제성장을 위한 압축끼니, 압축영양의 상징이었다. 이 포장은 1969년 주황색 바탕, 짙은 파랑의 둥글둥글한 글씨체의 이름으로 변하였고, 이후 ‘삼양라면’ 포장의 원형이 되었다. ‘왈순마’(1968년)는 흰 머리끈과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를 캐릭터로 내세웠고,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에 납품되기도 했다. 이외에 ‘궁중탕면’(1971년)에서는 왕과 왕비의 모습, ‘이백냥’(1978년)에서는 농악대가 등장했다. 또 쇠고기 국물 맛 라면이 인기를 얻으면서, 소 그림이 거의 모든 회사의 포장에 대대적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달밤에 서로의 논에 볏단을 가져다 놓는 시골농부로 형제애를 표현한 ‘농심(農心)라면’(1975년)은 농경민에서 산업화의 역군으로, 노동자로 바뀐 사람들에게 고향의 마음으로 다가와 비약적인 판매량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초기의 라면 포장에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전통 사회와 농촌 풍정이 쓰였고, 동시에 라면의 이름이나 그림을 통해 이미지를 다각적으로 설정하려 한 시도가 보인다.

■주황, 편하고 대중적인 원조의 맛

1970년대 라면 포장의 색은 주황으로 거의 통일되어 라면의 원조색으로 자리 잡는다. ‘삼양라면’의 압도적인 판매량으로 인한 모방 때문이기도 했지만, 색채 생리학에서 볼 때 사랑스럽고 대중적인 오렌지, 당근과 살구의 색인 주황은 입에 군침을 돌게 하는 맛의 색이다. 또 심리적으로 보면 ‘밝지만 노랑처럼 눈부시지 않고, 따뜻하지만 빨강처럼 덥지 않아서, 정신과 육체가 즐거운 색’이기도 하다. 값비싸고 특별한 형식보다는 편안한 먹거리인 라면에 어울리는 색이다. 이러한 주황색 포장은 구수함을 강조한 ‘안성탕면’(1983년)을 통해 편한 맛으로 자리 잡았고, 자사의 ‘오뚜기’ 캐릭터를 강조하며 등장한 ‘진라면’(1988년)은 노란색과 함께 매운맛에는 빨강, 순한 맛에는 주황을 썼다. 고기와 파, 고추 등의 고명 사진은 초창기부터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인쇄기술이 좋지 않아 환영받지 못하고, 사진술이 발달한 80년대 중반부터 고급스러운 고명이 얹혀진 포장들이 등장했다. 초기에 닭과 소의 그림으로만 영양가를 강조하던 시기를 지나, 선명한 고화질의 먹거리 사진은 빈곤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이런 럭셔리 고명을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마케팅 꼼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빨강·검정, 자극과 특별함의 추구

1986년 ‘신라면’이 나오면서 라면 포장에 빨간색이 자리 잡았다.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매울 신(辛) 자가 커다란 붓글씨로 쓰여지면서 포장의 타이포는 커지기 시작했다. 초기에 흰색 라면 그릇이 까만 그릇으로 바뀌면서 포장은 더 강렬해졌다. 이 포장은 주황색의 중간색으로 영양가를 채워주던 라면 맛과는 대별되는 자극과 열정의 상징이 되었고, 이는 올림픽과 해외시장 개방, 경제성장의 분위기가 허용한 강렬함이기도 했다. 이후 빨강은 ‘열라면’, 모든 김치라면의 바탕으로 사용되었고, ‘꼬꼬면’의 빨간 국물, ‘앵그리 꼬꼬면’에도 등장했다. 일반 라면의 2.5배 이상의 가격을 달고 ‘신라면 블랙’(2011년)이 고가 전략에 영어 효과를 노리면서 번쩍이는 블랙 옷을 입고 등장했다. 양반과 귀족의 차지였던 다채롭던 색의 세계는 새롭게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들이 택한 색은 검은색이었다. 모든 것을 가격으로 추상화해버리는 자본의 특성처럼 감정 덩어리의 색계와 달리 블랙에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무겁고 강하며, 현대성, 기술, 힘, 도시성의 상징이다. 근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편의점 브랜드 라면들은 기존의 맵고 자극적인 맛보다 더 강하게 출시된다. 이를 그대로 표현한 포장은 빨갛고 까만 색깔에 크기도 커지고 그림도 더 자극적이다.

■ 흰색과 노랑, 웰빙의 유토피아를 그리며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웰빙 라이프, 간식과 패스트푸드의 다양화, 주 소비군인 10~20대의 인구 감소 등은 라면 시장의 정체를 가져왔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맛의 고급화, 세분화, 다양화가 가속되었다. 생면, 안 튀긴 면, 다이어트 면 등이 출시되면서 자극 없는 부드러움을 강조하였고, 이는 포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맛있는 라면’(2007년)의 포장에는 흰색 바탕에 싱싱한 당근과 양파·대파·피망·브로콜리 등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선명하게 들어갔고, ‘자연은 맛있다’(2011년), ‘야채라면’(2013년) 등도 흰색에 그림으로 일관된다. 검은색이 지상의 권위와 힘을 상징한다면 흰색은 순수를 나타내며 환한 기분을 주는 빛의 색이기에 이들은 새로운 맛의 세계를 확실히 약속했고, 라면이 값싸고 영양이 없다는 이미지를 바꾸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여기에 샛노랑 바탕에 초록색으로 이름을 단 ‘참깨라면’(2012년)을 통해 노란색이 또 하나의 영양을 약속하며 입성했다. ‘삼양라면 더 클래식’ 역시 주황이 아닌 노란색으로 출시되었다. 노란색은 빛과 지혜의 색이면서 낙관적이며 희망적인 색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재 한국의 라면 포장은 빨강, 주황, 노랑의 난색 계열과 흰색, 검정의 극과 극의 대비되는 스펙트럼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라면 이름의 글자체 역시 초기의 둥글둥글한 모양의 파랑으로 출발했지만, 강하고 휘날리는 모양새의 검은색으로 변했다.

■ ‘안쓰러운 맛’을 감싸는 디자인

스파게티면의 포장은 거의 예외 없이 투명한 부분이 있어 안의 면 상태를 보여준다. 태국이나 인도의 포장은 보라, 분홍, 갈색 등 알록달록 화려하며, 중국 것 역시 인물과 문양 등이 다양하다. 일본 것은 화사한 색에 꽃, 동물 캐릭터 등이 많으며, 용기면의 속껍질에도 유쾌한 그림이 들어가고 스마일 어묵 첨가물이 보는 순간 미소를 짓게 하는 등 재미와 차별화가 뚜렷하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내용물보다 포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화해보면, 한국의 라면 포장은 은박 폴리로 통일되어 있으며, 내용물보다 많이 크다. 기능적으로 훌륭하지만 색깔이나 서체에서 섬세한 차이가 없으며, 5개들이도 일일이 다 컬러 포장을 한다. 거의 모든 한국의 공산품들, 명절이면 넘쳐나는 최극단 과다포장 문화에서 라면 포장 역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5개들이 개별 포장에서라도 산뜻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런데 현재 포장으로는 기존의 판매량을 다칠까 하는 마음, 낱개로 풀어놓아도 화려하게 눈에 띄어야겠다는 심리 이외에 보이는 것이 없다. 포장이 바뀌면 기업의 자세가 바뀐 것도 느껴지고, 환경에도 좋고, 값도 내려 소비자도 좋고 모든 것이 좋다. 과한 것을 덜어내는 그 자세에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박수를 칠 것이고, 이 시대는 환경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기업의 의무가 되었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에서 세상이 부박한 것처럼 라면의 맛도 부박하며, 그렇기에 인이 박이는 안쓰러운 맛이라 했다. 그리고 라면 시장은 소외된 군중 속에서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부러움과 찬탄으로 빛나는 최고의 스타들이 등장하는 광고처럼 한국의 라면 포장은 크고 고급스럽다. 그리고 미각이 아닌 통각, 즉 자극과 통증인 매운맛이 대세이고, 포장은 그를 확대 재생산한다. 하지만 삶이 여유로워지고 수입이 높아질수록 음식이 가볍고 부드러워지는 것은 문화인류학적 정설이다. 부르자틴이 말한 대로 “색은 말해질 수 없는 멍울이며, 이슬처럼 맺힌 생의 얼룩”이다. 자극적인 색들로 펼쳐지는 한국 라면의 포장들은 소외된 군중들의 말해질 수 없는 맵고 강한 삶의 색깔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큰 것들이 기를 펴는 세상이다. 내용물보다 크고 고급스러워서 오히려 부박한 라면 포장이 안쓰러운 맛을 감싸는 작은 디자인이 되기는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11201945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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