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 기업 지배구조 제도개선 시급하다 / 윤정선(경영대학) 교수

월터 휴렛은 휴렛패커드의 공동창업주였던 윌리엄 휴렛의 장자로 휴렛패커드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2002년 휴렛패커드와 컴팩의 합병에 반대하다가 이사회에서 사임을 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당시 휴렛패커드의 전문경영인이었던 칼리 피오리나는 PC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PC업계의 또 다른 강자인 컴팩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월터휴렛 이외에도 휴렛패커드의 또 다른 공동창업주였던 패커드 가문 또한 이 합병에 반대했다. 이 당시 월터 휴렛은 휴렛패커드의 지분 5%를 보유하고 있었고 패커드 가문은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지분을 보유한 대주주이자 창업주 후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기업의 합병은 성사됐다. 이 합병은 결국 휴렛패커드 주주들의 크나큰 손실로 귀결됐고, 그로부터 4년 후 합병을 주도했던 전문경영인 칼리 피오리나가 경영일선에서 사임했다.

휴렛패커드와 컴팩의 합병을 둘러 싼 이 일화는 우리 기업 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전해준다. 결과적으로 주주가치를 훼손한 합병을 막지는 못했지만 휴렛패커드와 같은 대기업에서 대규모 지분을 보유한 창업주의 후손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을 감시하는 일에 매진하는 경우는 국내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경영진을 통제할 만큼 높은 지분을 보유한 대주주가 존재하는 것은 기업가치에 두 가지 상반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바람직스럽게는 휴렛패커드의 경우와 같이 대주주가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의 경영권을 양도하고 자신은 경영진에 대한 감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소액주주들의 경영진 감시에 대한 무임승차문제를 보완함으로써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소액주주의 권리보호가 미흡하고 기업지배구조가 잘 정비되지 못한 국가에서는 대주주의 존재가 오히려 기업가치에 해가 될 수 있다. 이는 대주주가 주주에게 부여된 현금흐름에 대한 권리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기업을 경영하거나 경영진을 통제함으로써 사적이익을 추구하고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주주가 경영진에 대한 감시자로 남기보다는 기업을 경영 또는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알만한 기업들은 대부분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대주주가 은퇴나 사망을 앞둔 시점이 되면 단순히 지분상속을 넘어서 경영권 자체를 대물림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심지어는 형제간이나 가까운 인척간에 경영권을 둘러싸고 사생결단의 대결이 벌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해 이로 인한 주주가치의 손실 또한 막대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관행이 돼버린 대주주 일가의 경영세습과 사익추구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소규모의 지분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을 지배하는데 활용되는 상호출자 등에 대한 제약을 강화하고 또한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다 철저히 보호하는 등 지배구조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주주 혹은 대주주의 후손들이 기업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보다는 경영진 감시 등을 통해 주주의 이익을 지키는데 힘을 쓰는 것이 득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703220210235160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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