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손영준] 靑 국민청원, 정치 공방의 잔으로 변질됐다/ 손영준(언론정보학부) 교수

청와대 국민청원이 정치적 논쟁과 공방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소외된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창구에서 최근에는 여야 간 정치 현안이 맞부딪치는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 대한 정당 해산이 청원되더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정당 해산 청원도 잇따랐다. 청원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지난주에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 대한 삭발 청원과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에 대한 내란죄 적용 청원,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원도 이어졌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소통’을 강조해온 문재인정부가 2017년 8월 청와대 홈페이지에 개설한 온라인 국민 참여 게시판이다. 처음 1년간 25만건의 청원이 접수됐다. 하루 평균 720건꼴로, 그만큼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이 많다는 증거다. 청와대가 답변 기준으로 제시한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은 49건이었다. 청원 내용은 주로 인권, 성평등, 정치 개혁 등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근래에는 청원 건수가 점차 줄어 2019년 4월 한 달간은 하루 평균 20건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개인 입장에서는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사회적 현안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도구다. 비용과 시간도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나 운영 과정에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국민청원제의 발전적 진화를 위해 개선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와대 청원은 익명성에 기반하고 있다. 누가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익명성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공적 현안의 합리적 소통 공간으로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누구든지 손쉽게 글을 쓰고 동의를 누를 수 있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청원의 진정성과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한 진정성 또한 개인의 불만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검증과 비판의 장에 개방돼야 한다. 조선시대 청원의 한 방법인 격쟁(擊錚)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격쟁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 행차 때 징이나 꽹과리를 요란하게 쳐 이목을 끈 뒤 왕에게 호소하는 제도다. 그러나 누구나 마음 놓고 꽹과리를 치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다. 꽹과리를 친 사람은 조사에 앞서 형조에서 곤장을 먼저 맞아야 한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초주검에 이를 후속 곤장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 격쟁은 곤장을 때리는 다소 미개한 방식으로 청원의 진정성을 검증했다.

둘째, 정치적 행위자인 청와대가 청원의 창구가 됨에 따라 정치적 청원 이슈가 과잉 정치화되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청원은 집권 정부와 지지자 간의 소통을 촉진·강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야당과 반대파를 위한 소통과 화해의 공간은 협소해 보인다. 청와대가 정치 현안에 대해 선명한 입장과 예리한 각을 세우면 세울수록 편 가르기 현상은 심화된다. 정치적 이슈에 대한 당파성의 강화는 국민청원을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장이 아니라 정치성, 이념성이 충돌하는 상극(相剋)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청원에 수십만명, 100만명이 동의한 것은 적지 않은 수치다. 그러나 정치 과정에 대한 다수결적 의사 표현은 투표에서 가능하다. 현안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 모색이 선결과제다.

셋째, 청와대 국민청원은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공론의 장 기능이 취약하다. 네티즌이 의제를 만들고 불특정 다수에게 동의를 구하는 방식이다. 표출되는 의견은 대개 호(好), 불호(不好)의 정서적 반응이다. 철학적 성찰과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갈등의 진면목(眞面目)을 종합 토론, 소통하는 기능은 부족하다. 정서적 의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주관적 신념은 엄격한 공적 토론의 대상이 돼야 한다. 정당 해산과 탄핵죄, 내란죄는 헌법재판소와 국회, 법원에서 엄중한 절차에 따라 다퉈야 할 사안이다. 정부의 역할이 없지 않겠지만, 헌법재판소와 법원 심리를 통해 최종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누구든지 정치 현안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 시민 스스로 “내 의견이 정치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정치적 효능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 제기한 익명성과 정치성, 정서적 반응에 그친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개선 방안이 마련되지 못한다면 정치적 공방의 장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6583&code=11171314&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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