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국문학 새로운 상상력을 찾아서>(5)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 - 방민호(국문)교수
결혼세태 비꼬며 세대 정체성 탐구


김별아, 김연수, 김종광, 백민석, 전성태 등으로 연결되는 1970년 전후 출생자들 가운데 김연수는 1990년대 문학의 ‘종언’을 예시하듯 일찍 세상을 떠난 김소진의 적자다.

김소진이 남긴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는 각별한 한국어 의식이다. 한국문학의 생명으로서 한국어는 생물종과 같은 고유성으로 혼종과 합성에 저항하는 유전적 기질을 함유하고 있다. 김연수는 김소진이 지녔던 한국어 문법과 어휘에 대한 의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이것을 더욱 동시대성 쪽으로 밀어붙여 새로운 형상의 세계를 직조해낸다.

이러한 기술가(技術家)의 면모를 가장 여실하게 보여준 작품은 바로 ‘붌빠이, 이상’이었다. 실존했던 작가 이상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자료와 자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인문학적 상상의 틈을 넓히는 태도는 김연수의 개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세대의 대부분처럼 김연수는 아직 그 자신의 문학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해 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 김연수 세대의 작가들은 닻을 올리고 항해를 떠났지만 많은 풍파와 모험이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도상(途上)에서 김연수 소설의 미래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사랑이라니, 선영아’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가볍게 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세대론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중요한 의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자기 자신의 세대적 정체성을 기법화하여 드러내려는 의욕이다. 그는 담론이 아니라 풍속과 풍자로 그가 속한 세계의 에피스테메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의 제목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물론 한때 세인의 관심이 되었던 광고 카피 ‘선영아, 사랑해’의 패러디다. 약 4년 전 총선거가 실시되던 무렵에 서울의 빌딩 벽이나 달리는 버스에 장착되었던 이 광고 카피는 영문 모르는 관객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한 작품 속에서 선영이를 사랑하여 결혼한 광수는 ‘광수 생각’의 광수에서 따온 것일 텐데 작품 속의 광수는 증권사 직원으로 소설가의 애인을 ‘넘겨 받아’ 꿈같은 결혼을 이룬다. 전선이 뚜렷했다는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엽의 작가들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불분명한 채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김연수는 이제 그것을 증권사 직원과 소설가의 대립, 즉 화폐적 가치와 ‘진정성’ 사이의 대립으로 요약해 낸다.

중요한 것은 김연수의 풍자가 타자가 아니라 자기를 향해 귀결되어 간다는 점이다. 사랑을 잃은 진우는 경복궁의 경회루를 배경으로 홍곤룡포를 걸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홍곤룡포는 임금님의 의복이다. 그러나 현대의 홍곤룡포는 한갓 사진찍기 놀이를 위한 설정이며 포즈일 뿐이다. 이런 마지막 장면조차 사실은 흔하디 흔한 영화의 마무리 기법을 가볍게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차용이야말로 김연수가 겨냥한 세련이다.

이념이 사라져버렸다는 폭력적인 주장이 백주에 횡행하는 시대에 김연수는 결혼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통과 의례를, 그것을 둘러싼 유치한 치정극으로 둔갑시켜 날카로운 자기 세대의 풍자로 연결시킨다. 한때 ‘애국’이라는 구호로 치장되었던 그들 세대의 본모습은 범람하는 광고와 유행가와 스크린과, 단순하고도 명쾌한 사랑의 이념과, 그러한 것들에 의해 강화되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짓눌려 버렸다.

나는 김연수의 그중 가벼운 소설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은 해석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에게는 중요한 결절점을 이루는 듯하다. 그는 사실과 풍속으로 시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를 기법화하는 작가로서 채만식과 김소진처럼 모국어 의식이 뛰어나면서도 인문학적 비판력을 겸비한 작가로 성숙해 갈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자질이야말로 오늘날 그가 속한 세대의 문학을 생각해 볼 때 희소하고도 귀중하다.

혼종과 혼합의 측면을 과도하게 중시하고 민족 담론을 외면하는 풍조가 한국어에까지 미친 오늘의 젊은 문학 가운데 김연수는 한국어의 변별적 자질과 한국어 고유의 상상적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는 흔치 않은 작가인 것이다.

방민호(문학평론가·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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