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손영준의 미디어 비평] '관찰자 시점'을 버린 언론 / 언론정보학부 손영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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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이나 "논란" 보도가 줄고 있다. 대신에 선(善)과 악(惡)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특정한 해석적 틀을 제시하는 보도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의 뉴스 전문 검색 사이트인 카인즈를 검색한 결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의 1면 헤드라인에서 공방이나 논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우는, 지난해까지 매년 100건 내외였다가 올 들어 9월 하순까지 38건에 그쳤다. KBS, MBS, SBS 뉴스 헤드라인의 경우에도 2000년 이후 매년 500건 안팎이다가 올해는 지금까지 101건이다. 역시 많이 줄었다. 공방이나 논란 보도는 언론이 대립적 담론 구조에서 관찰자 입장에 선다는 의미다. 사회적 진실 판단에 있어서, 일정 기간 유보적이다. 이런 보도는 선명하지 못해 애매하며, 화끈하지 못해 지루할 수 있다. 반대로 가치 개입적인 보도는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를 뚜렷하게 구분한다. 골치 아프게 이것저것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정답이 나와 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공방, 논란 보도는 사회적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치중립을 위장해 결과적으로 특정한 가치를 편드는 경우가 있었다. 사회적 진실을 찾아가는 공론의 장이 제대로 서지 못했던 탓이다. 최근 공방, 논란 보도가 대폭 감소한 것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진실이 쉽게 정리되기 때문일까? 언론의 전문성과 취재력이 높아진 결과일까? 필자는 그것보다는 해석 저널리즘(Interpretive Journalism)과 주창 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이 과도하게 수용된 결과로 이해한다. 해석 저널리즘이나 주창 저널리즘은 언론의 진실 보도라는 명분아래 이뤄진다. 진실 보도는 저널리즘의 가장 큰 덕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 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파악되지 못하다는데 있다. 대단히 복합적이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과정, 거짓을 걸러내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경험적으로 볼 때 그렇게 쉽지 않다. 선전과 선동, 헛정보, 역정보를 걸러내는 과정은 시행착오를 동반한다.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사안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사회적 또는 상대적 진실은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절대적 기준이 없다. 사회 내부의 권력관계에 따라 구조화하는 특성이 있다. 선전ㆍ선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론일지라도 그것은 사회적 진실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래서 사회적 진실을 확보해 가는 과정은 공정한 게임의 룰이 필요하다. 언론의 공론의 장 역할은 게임의 룰이다. 그것은 검증 가능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에 대한 언론 보도에는 공론의 장이 사라졌다. 다양한 생각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었다. 특정한 해석적 틀이 전파되는 공간이다. 사실관계(facts)는 특정한 해석적 틀을 강조하는데 활용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사실관계 그 자체가 어떤 해석적 틀을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보도는 찾기 힘들다. 보수든 진보든 언론 보도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뉴스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지 않은 의견이 쏟아졌다.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언론은 해석적 저널리즘, 주창 저널리즘을 통해 사회적 진실을 확보하기보다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재생산하고 있다. 사회적 담론 논쟁에서 헤게모니의 쟁취, 그것이 본질이다. 제로섬 게임이다. 윈-윈 하는 경우는 없다. 언론은 논쟁의 한복판에 서있다. 뉴스를 전달하는 입장이 아니다. 사회와 수용자를 연결하는 고리가 아니다. 권력관계의 행위자(actor)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언론이 권력행위의 당사자로 등장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피곤해진다. 시민사회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논란이나 공방 보도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해 공론의 생성을 촉진하는 효과라도 있다.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공론의 장을 필요로 한다. 해석적 저널리즘, 주창 저널리즘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언론이 새겨야 할 시대적 덕목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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