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 ‘법조삼륜’ 오해 / 김동훈 법과대학 교수

〈김동훈 국민대교수·법학〉

이용훈 대법원장이 일선법원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한 몇 가지 발언들로 인해 법조계에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검찰은 불만을 표하면서도 지나친 확대를 우려하는 듯 하고, 변호사회는 대법원장 퇴진요구에서 나아가 탄핵 등을 거론하며 강경하게 반발하고 있다.

물론 대법원장의 발언을 평가하는 데에는 일선법원의 실무자들에게 향해진 것이라는 점, 또 모든 발언을 맥락을 떠나서 거두절미하여 인용하게 되면 전체적인 뜻이 왜곡되고 선정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표현은 대법원장으로서의 품격에 비추어 다소 그 도를 지나친 감이 있다.

-‘견제없는 암묵적 협력’의구심-

대법원장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우리의 사법절차에 있어 이른바 ‘법조삼륜(法曹三輪)’이라 불리는 법원, 검찰, 변호사의 역할을 재음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 간 사회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해온 법조삼륜이라는 표현은 상당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 마치 세 주체가 대등한 위치에서 일종의 협력관계에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법원이나 검찰의 정기인사가 끝나면 일간신문에는 변호사 개업 인사 광고가 줄을 잇는다. 그간 재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실히 봉사하겠다는 광고를 보면 그 간 법원이나 검찰에서의 근무는 변호사업을 위한 연습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장래에 결국 변호사업계에서 다시 만날 사이라면 이들 직역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협력관계가 작용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도 드는 것이고, 이것이 국민의 사법불신에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직역은 서로 철저한 견제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사법을 경기에 비유한다면 검찰이나 변호사는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이고 법원은 심판이다. 얼마나 멋지고 공정한 경기였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관중인 국민들의 몫이다. 범죄를 수사하여 기소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검찰에 있어 1차적인 가치는 범죄자를 밝혀내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죄를 짓고서도 편히 잠자는 자를 없애겠다는 검찰의 정의감은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이라는 또 하나의 가치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과 안목을 가져야 하는 것이 법원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길이 형사재판에 있어 공판중심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밀실에서 작성된 조서보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통하여 드러나는 사실이 더 우위의 증거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의 ‘검찰의 조서를 던져버려라’라는 발언은 이러한 정신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공판중심’ 재판으로 투명하게-

민사재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종래의 민사재판은 법정에서 원·피고 사이의 구술공방보다는 서면의 제출로 대신하는 싱거운 서면주의 재판이 주를 이루어왔다. 이에 사건당사자들은 재판과정의 투명성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이것이 재판부에 사실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전관(前官)’들에 대한 선호라는 불합리한 관행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를 타파하는 데에는 역시 법원의 분발이 요구된다. 당사자들의 주장이 구술로 법정에서 이루어지고 증거조사도 구술로 이루어질 때 서면심리만으로는 알 수 없거나 빠지기 쉬운 함정에서 벗어나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역시 변호사들이 제출하는 서류에 대한 비하적 표현이 나온 듯하다.

아무쪼록 이번 사태가 우리 법조계의 각 직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검찰의 유죄입증을 위한 다양한 증거제출과 변호사들의 의뢰인을 위한 치열한 방어가 법정에서 이루어지고, 재판부는 치밀한 심리와 노련한 법정운영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고뇌가 표출될 때, 방청석의 국민들은 우리의 사법에 신뢰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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