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전시]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도시를 위하여 / 제로원 [루에디 바우어 특별전]

 

 

사유 건물의 겉모양이나 점포의 간판은 공공디자인의 영역에 속할까? 정답은 그렇다, 이다. 내년부터 시행될 ‘간판면적 총량제(새로 건설되는 신도시는 건물별 간판 총면적에 제한을 두는 법)’는 그와 같은 공공디자인의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간 과도한 양의 간판들이 사방에서 번쩍거리며 도시 미관을 적극적으로 훼손해 왔다면, 행정기관의 공공디자인에 대한 무관심 속에 오직 실용성만을 위주로 설치된 가로시설물들은 도시 미관을 소극적으로 훼손해 왔다고 할 수 있을 터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서울의 재개발 계획과 맞물려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국민대학교 제로원 디자인 센터에서는 공공디자인에 대한 좋은 참고사례가 될 루에디 바우어 특별전을 열었다.

임수진 대학생기자(gyepy@naver.com) 루에디 바우어는 현재 프랑스 공공디자인을 선도해나가고 있는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는 공간의 고유한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을 통해 공간의 정체성을 부각ㆍ형성시킨다. 그가 디자인을 맡은 쾰른 본 공항(Cologne Bonn Airport)은 공항이란 세련되지만 차갑다는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여행가방, 바다, 자동차, 해 등등의 아기자기한 그림문자들을 공항 곳곳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이 그림문자들은 여행과 이동이라는 공항 고유의 특성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사실 공간의 정체성 문제보다도, 모두를 위한 시각적 쾌감 제공이라는 공공디자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는 데 더 의미가 있다. 근엄한 공항 유리벽에 거대한 연두색 비행기 그림문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때 누구든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

바우어는 “아름다움과 대화를 불러일으키는 도시 환경 조성”을 위해 1983년부터 2010년까지 계속될 대 리옹 프로젝트(Greater Lyon)에도 참여했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하나인 리옹의 생 장 구역에, 그 구역 특유의 전통적인 건축적 디테일을 활용해 방향 안내판을 만들었다. 바우어가 디자인한 방향 안내판들은 주변 환경과 동떨어진 천편일률적 가로시설이 아니다. 주변 환경과 적극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주변 환경에 풍성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는 메리노 주차장(Car park in Merino)에 전통적인 상징을 쓰지 않았다. 바우어는 A, B, C, D나 적색, 청색, 녹색 등의 색상, 혹은 숫자들은 차를 주차한 뒤 어디에 차를 주차해두었는지 잊어버리기 쉽다는 데 착안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요소들 대신 이미지를 활용해 주차장의 방향 표시를 했다. 1층을 나타내는 숫자 위에는 커다란 푸른 눈이, 2층을 나타내는 숫자 위에는 붉은 별모양이 그려져 있다. 바닥은 구획 지어 한쪽에는 개울가의 돌을, 한쪽에는 나뭇잎을 그려 직관적으로 기억하기 쉽게 했다.

‘생태적 디자인’은 루에디 바우어의 큰 테마 중 하나다. 바우어는 환경친화적이며 인간적인 요소를 중시한다. 삭막해지기 쉬운 공업단지 안에 보다 감성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는 대 리옹 공업단지(Industrial Areas of Grand Lyon) 내에 넓게 펼쳐진 밭에 시선을 돌렸다. 밭에서 볼 수 있는 나뭇잎, 풀, 꽃들의 이미지를 패널에 인쇄해 곳곳에 세우고, 방향 안내판에도 그 이미지를 활용했다.

이번 전시에는 루에디 바우어의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20년 간의 자취가 소개된다. 각각의 그래픽 작업들은 관람자가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는 접이식 페이퍼 롤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인쇄된 페이퍼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보시기를 권한다.

조명이 페이퍼를 정면으로 비추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표면이 번들거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툼한 양의 페이퍼 한 가득 소개된 바우어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보면 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란 말이 절로 나온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12&aid=000004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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