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 법의 정신에 비춰본 '규제' / 이호선 (법) 교수

李鎬善 < 국민대 교수·법학 >

왕복 2차선의 도로는 한쪽 구석을 장악한 차들로 인해 1차선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딱지 끊는 교통경찰은 없다. 노란선이 경고하고 있는 구역을 제외하곤 차량주차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사회가 영국이다. 자유가 허용돼 있는 대신 금지 또한 확실해 그 누구도 노란선의 금기(禁忌)를 위반하지 않는다. 위반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터에 독일의 베를린 의사당 앞에 차를 세워 두었다가 기겁을 할 뻔했다. 잠깐 차를 세워두고 사진 몇 장 찍고 오는 사이 언제 왔는지 견인차 받침대가 차량 밑바닥에 들어가고 교통경찰관은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금지되고 예외적으로 허용이 되는 독일의 문화에 익숙지 못한 탓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환상형 순환출자 도입을 하지 않고 출자총액제한의 적용대상을 축소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일련의 사정을 보면서 시장의 자유와 관련된 규제의 의의,그 방법과 효능에 관해 근본적인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연역적 사고 방식을 토대로 한 대륙법적 시스템은 원칙적으로 모든 행위를 규제의 대상으로 보고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발상을 갖고 있다. 원칙적 금지와 예외적 허용이 법률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허가'이다. 주차 허용표지가 따로 있지 않는 한 어떠한 주차도 불법이다. 그러나 귀납법적 경험주의의 정서를 갖고 있는 영미식 법률체제 아래에서는 자유가 원칙이며,규제는 예외다. 금지되지 않는 한 어느 곳에서건 주차가 가능한 까닭이 여기 있다.

대륙법과 영미법계가 서로 혼합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럽연합이 우리의 '독점금지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3장과 같은 내용의 기업합병에 관한 규정을 도입한 것은 1989년이다. 원래 유럽경제공동체 조약상에는 기업합병을 규제하는 직접적인 조항이 없었다. 이 때문에 1971년 뉴욕의 컨티넨털 캔 컴퍼니가 독일(당시는 서독)과 네덜란드의 금속 캔 및 병마개 생산업체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합병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 금지에 관한 조항을 확장 해석해 그 근거로 활용하다가 1989년에 와서야 별도의 입법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독자적인 법규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보험(1991년),R&D 관련계약(2000년),자동차(2002년),기술이전계약(2004년) 등 세부적인 산업부문에서는 별도의 규정을 만들어 합병 규제에 관한 기준을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해 왔다. 이것은 공동체 역내의 기술개발,경제발전,소비자 보호 등을 위해 집행위원회가 재량으로 기업결합을 승인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적극적으로 입법화한 것이었다. 반독점법은 시장 내에서는 공정거래와 소비자 보호를 꾀하지만,시장 바깥의 경쟁자들에 대해서는 시장 안의 기업들을 보호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과 기관들의 운영원리의 상당 부분이 일사불란하게 적용되는 대륙법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연합에서도 반독점 문제에서만은 기업의 자유를 원칙으로 예외적으로 제한하며,그 제한 역시 최소한에 머무르도록 배려하고 있다.

원칙적 금지와 예외적 허용은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의 발로(發露)이자 국가 만능주의의 산물이다. 이것은 허가권을 갖고 있는 정부나 관료들에게는 매력이 있을지 몰라도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과 자발성,도전의식을 꺾어 놓는다. 비단 출자총액제한만이 아니다. 각종 규제조치들을 검증되지 않은 목적과 추상적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들여와 꽁꽁 묶어 놓고 은전을 베풀듯이 가끔씩 규제를 예외적으로 풀어주는 행태는 전형적인 포괄적 금지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원칙적 허용과 원칙적 금지의 체제 간 우열은 적어도 경제에 관한 한 이미 2차대전 이후에 가려졌다. 금지가 원칙인 사회에서는 규제의 비현실적인 엄격함으로 인해 오히려 준법의식도 흐려진다.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만 유일하게 금지됐던 것은 인간의 본성이 원칙적 허용과 예외적 금지 쪽에 가깝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부 규제 혁파를 위한 접근은 이런 사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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