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 장석흥 (국사) 교수
1937년 강제이주 당시 한인들을 실은 시베리아 열차가 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역. 광장은 번화한 모습이지만, 역사는 옛모습 그대로이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 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대 첫 이주 이래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구 소련에 귀화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비귀화인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당연히 한국말이었다. 그만큼 민족성이 강한 한인들이었다.

그런 한인들을 스탈린은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들은 소련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강제이주라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1937년 9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그것이었다. 스탈린 정권이 왜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는가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구소련 정부는 ‘일본 첩자’로 이용될 우려가 있어 강제 이주시켰다고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사실 스탈린 정권은 훨씬 전부터 한인들의 강제이주를 계획한 일이 있었다. 192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한인 이주에 관한 지령’을 통해 대대적 이주정책을 수립한 바 있었고, 1930년 2월에는 스탈린이 직접 주재하면서 한인 이주에 관한 문제를 재차 다루었다. 1932년 7월에는 연해주 일대 한인들의 대량 이주에 관한 지령을 확정한 바 있었다. 이때 스탈린 정권은 이들 한인을 하바로프스크 변방의 외지로 분산시키고자 했다. 되도록 한인들을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고, 또 집단 생활을 영위하는 한인들을 분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193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극동지역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한인의 강제이주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제이주는 거대 강국의 야망을 가지고 전체주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스탈린 정권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련은 겉으로는 가장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를 표방했지만, 모든 정책은 오직 스탈린 독재를 위한 전체주의적 우상화가 지상 과제였다. 그리고 이를 공산당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소련내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통합수준이 높던 민족이었고, 밀집한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한인사회의 모습은 분할통치를 원하던 스탈린 정권의 방침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기근과 전염병 등의 재앙으로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끈질길 생명력을 가진 한인들의 전통적 농업활동인 벼농사와 채소 재배를 그곳에 도입시키려는 의도도 가미되고 있었다. 한인들은 그런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한 한인들이 첫 겨울을 지낸 카자흐스탄 마을에 세워진 기념비.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강제이주를 그야말로 비밀스럽고도 신속하게, 또 철저하게 처리해 갔다. 우선 숙청 대상자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감금하거나 총살시키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한인 강제이주의 집행을 담당케 했다. 또한 강제이주를 감행하기 직전,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한인사회의 대표와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다. 즉 한인들이 연해주 일대의 변방을 소련으로부터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그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날조된 모함에 의해 당시 포시에트 구청위원회의 제1서기관 김아파나시와 민족 시인 조명희 같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하바로프스크의 카를 마르크스 거리 입구에 산골짜기만한 깊은 웅덩이를 파고 강제이주를 반대하는 한인들 수백명을 집단 학살해 매장하기도 했다. 훗날 그 자리에 시립공동묘지가 만들어졌는데, 시립공동묘지 밑에는 그때 학살당한 한인들의 유골이 지금도 묻혀져 있다고 한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강제이주당하는 것에 항변하다가 희생 당한 한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강제이주는 준비 과정을 포함해 엄격하고, 지속적이며, 전면적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신상을 철저하게 파악해 놓고 있었으며, 철통 같은 감시를 통해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그렇게 해서 1937년 9월과 10월 두달 사이에 20여만명의 한인을 한 명도 빠짐없이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캄차카와 인근 벽지에 거주하던 한인들까지 이주시킴으로써, 하바로프스크 동쪽에 사는 한인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

강제이주의 수송 수단은 시베리아 철도였다. 50량 정도의 수송 열차에는 여객칸 1량, 위생보건칸 1량, 식당칸 1량, 유개화차 5~6량 외에 40여 량의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이 달려 있었다. 한인들은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에 2층 판자 침상과 조그만 난로를 설치해 개조한 차량에 짐짝같이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보통 한 칸에 5~6가구, 25~30명가량의 한인들을 실었으며, 한달 넘게 달려서야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카자흐스탄에 7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0여만명이 운송되었다.

수송 과정에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은 차마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 채 달리는 열차에서 죽어갔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자식과 어버이의 시신을 달리는 열차에서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강제이주 1세대자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었고, 그들에게는 지금도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겨져 있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은 20여 만명에 이르렀으나, 1938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한 한인의 수는 18만여 명이었다. 2만여 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 중 상당부분은 강제이주를 반대하다가, 또 수송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정착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소비에트정권 기간 내내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채 가슴속 깊게 묻고 살아야 했다.

강제이주 후 60여 년이 돼서야 러시아 정부는 1993년 4월 강제이주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정치적 탄압, 민족차별을 받아야 했던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20여 만명의 한인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강제이주 당시의 참상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스탈린 정권의 폭압적인 강제이주로 빚어진 통한의 역사는 어떻게 갈무리를 지어야 할까. 이들 한인의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어야 했던 희생 가운데도 가장 비극적인 상처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이해 그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13&articleid=2007022818062061340&newssetid=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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