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일회담, 굴욕협상만은 아니었다” / 이원덕(국제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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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일본학연구소(소장 이원덕)가 지난 19일 1952~1965년에 걸쳐 진행됐던 한·일회담 외교문서를 분석한 해제집을 발간하면서 “한일회담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밝혀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원덕 소장 등 5명의 연구팀은 지난 3년 동안 2005년 8월에 전격 공개된 총 3만6000 페이지 분량의 한·일회담 문서를 해독,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일협정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로 체결된 ‘굴욕외교’의 전형으로 치부했던 그동안의 학계와 일반인들의 인식 상당 부분은 과도한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물론 연구팀이 일본의 한국침략 사실 불인정 및 진정한 사죄 부재 등 기본적 한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협상 자체는 우리 정부가 사전에 치밀히 준비했으며, 유능한 관료들의 외교전과 활발한 외교채널 가동을 통해 협상이 상당히 효율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는 새로운 객관적 평가에 도달했고, 이 같은 역사·외교적 평가까지 싸잡아 폄훼돼서는 안된다는 게 연구팀의 주장이다. ◆유능한 관료와 외교… 외교훈령에 갇혔던 JP = 한·일회담의 최대 의제는 대일 청구권 및 액수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14년에 걸친 협상 과정에서 동북아로의 공산권 침투를 막기 위해 한·일 수교를 적극 지지한 미국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로써 청구권 액수 조정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증거들이 외교문서 곳곳에서 발견됐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이원덕 소장은 “한·일회담 외교문서를 두루 분석하면서, 한국 정부는 한·일협상에 앞서 치밀한 사전 검토와 준비 과정을 거쳐 회담에 임한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당시 정부는 신생독립국인 위치에서도 놀라우리만치 식민지 모국이었던 일본을 상대로 효율적이고 유능한 외교를 벌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에 등을 떠밀리거나 일본을 지지한 미국의 원칙과 입장에 굴복해 굴욕적인 외교를 벌였다는 종전의 평가는 지극히 단순화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 실례로 한국정부는 주한, 주일 미 대사관을 지속적으로 접촉, 청구권 액수를 높이는 데 주력해 성과를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1962년 8월 주일 한국 대사관이 주일 미 대사관 슈스미스 서기관과 면담한 내용, 같은 해 9월 주일 한국대사가 ‘러스크(미 국무장관)-오히라(일 외무상)’ 회담 결과에 대해 입수한 정보를 보고한 문건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 문서에는 미 국무성이 일본에 대해 “한국 정부가 경제개발에 필요로 하는 자금을 무상공여와 정부 차관 명목으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수준까지 증액 지원할 것”을 설득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한·일협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돼 온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사실은 체계적인 관료 조직과 외교 훈령에 갇혀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JP는 1962년 11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상과의 담판을 통해 청구권 액수 기준선에 합의했다. 이른바 ‘JP-오히라’ 메모는 무상자금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 제공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외무부가 일본 동향을 파악하고, 치밀한 사전 검토를 거쳐 제시한 액수임이 드러났다. JP-오히라 회담 직전 주일대사는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에서 “김종필 부장에게 폭넓은 교섭권한을 부여하되, 일본측에 청구권 금액 최저선을 순변제 및 무상공여 3억5000만달러와 정부차관 2억5000만달러로 설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JP에게 총액 기준으로 최소 6억달러 이상의 교섭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사활 건 외교전… 어업평화선, 북송문제 = 한·일협상시 재일 한인 북송과 어업평화선 문제는 대일 청구권을 관철시키기 위한 ‘바게닝 칩’ 또는 부차적 문제로 다뤄졌다는 게 지금까지의 학계 평가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 사활을 건 외교전을 펼쳤음이 드러났다. 북송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남한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평화선은 당시 한국 산업구조에서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컸던 이유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어업평화선에 관한 외교문서는 각 분야를 통틀어 가장 많은 1314건(총 3819건)에 달한다. 그만큼 한국정부가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는 방증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8월 국방장관, 외무장관, 주일 대표부 대사에게 “제주도 부근 한국섬을 일본이 맥아더선(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일본 근해에 선포한 선으로 조업이 금지된 선)을 구부려 일본 측으로 편입시키려 하니, 전국민이 같이 싸워야 한다. 외무부는 일본당국과 연합군 최고사령관(SCAP)과 교섭, 속히 막을 것”을 지시한 문서에서도 정부의 이 같은 엄중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어업평화선은 국제법상 공해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 어업을 보호하고 한·일간의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영국 등을 적극 설득하는 한편, 영해 기준을 상당히 넓게 봐 12해리로 주장했던 것도 정부의 탁월한 외교적 안목이었다는 평가다. 또 정부는 북송 문제와 관련해선 1959년 7월 ▲한인 북송은 한·일간 정치적 문제로 논의돼야 함 ▲휴전협정에서 전쟁포로 송환의 경우도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고 공산치하로 송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음 ▲일본의 북송 계획은 대한민국 주권을 부정하는 행위임 등 16개 항목을 들어 조목조목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적극 대처했다. ◆일본 역청구권 철회 관철 = 한·일회담 초기, 일본은 한국의 변제권 주장에 대해 재한 일본인의 재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청구권이 샌프란시스코조약 규정(제4조 b항)에 위반되는 것이라는 법률적 반박을 내놓고, 조약 해석을 미측에 의뢰했다. 또 미국 정부는 1952년 4월과 1957년 12월 해설각서를 통해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해 재한 일본인의 재산청구를 주장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미측의 조약 해석을 수용해 1957년 12월 대한 청구권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이범 국민대 연구원은 “이승만 정부가 한·일회담과 관련해 외교적 성과를 전혀 내놓지 못했다는 부정적 인식만 존재해 왔다”면서 “그러나 미 군정이 끝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을 통해 일본의 역청구권을 좌절시킨 것만으로도 성과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195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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