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名士 멘토의 열공특강] 법학자 이호선 승리는 이미 내 안에 있다 "공부엔 자신감이 에너지" / (법)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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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만에 고교 자퇴 후 검정고시로 대학 합격 '나는 할 수 있다' 믿음 단기간 사시합격 비결 국민대 법학과 이호선(45) 교수는 일찌감치 '6040120'의 인생목표를 잡았다. 60은 법학자로서 전공분야 논문을 60편 쓰겠다는 의미고, 40은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한 저서의 수, 120은 그의 장례식 때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의 수를 의미한다. 그는 "인도 속담에 '네가 태어났을 때 너 혼자 울고 모든 사람이 웃었다. 네가 죽을 때 너 혼자 웃고 모든 사람이 울게 하여라'는 말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고교 재학 기간 '3주'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돼서야 집에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시골에 살았다. 어린 시절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산과 들을 마구 뛰어다녔다. 그 시절 "자연은 결코 어떤 과정을 생략하거나 쉽게 뛰어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농사일과 같았다. 때를 놓쳐서도 안 되고 당장은 급하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를 해놔야 다음해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령과 반칙이 안 통하는 대상이 바로 자연이었고, 자연을 통해 공부와 삶을 생각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공부는 그런대로 잘했지만 범생이는 아니었다. 중2 무렵, 소설가 최인호의 '병태' '치국' '영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죄다 읽었다. 문장력이 좋아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은 그의 몫이었다. "이웃 마을로 다니며 주말엔 친구들 집에서 잔 적이 많고, 아예 솥까지 준비해 닭과 오리 서리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법의 잣대로 말하자면 '특수절도'에 해당하는 짓이었다. 평창중을 졸업하고 고교진학이 막막했다. 가난 때문에 도시의 명문고 유학은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1980년 학비 전액을 보조해주던 경북 구미의 '구미전자공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3주 만에 학교를 자퇴했다. "교장 선생님이 투스타 출신 군인이셨고 기숙사 점호에다 운동장을 연병장으로 부를 정도로 규율이 엄한 학교였어요. 시골 아버지께 자퇴하겠다고 말씀드리니 '1년은 참으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하루도 견딜 수 없었어요. 3주 만에 학교를 자퇴해 '낙향'하게 됐습니다."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지만 막막했다. 그해 6월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의 생계와 농사를 모두 외동아들인 그가 떠안게 됐다. 그러나 학교는 포기했지만, 공부까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웃집 형이 보던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에서 독서실 총무 생활로 몇 달간 일하다 공장에 취직했다. "검정고시 학원에 갈 형편도 못 됐어요. 독서실 총무, 구로공단 비닐공장, 김포의 주물공장, 액세서리 가내 수공업체 등지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했지요. 돈을 조금씩 저축해 고교 참고서를 과목마다 한 권씩 사서 틈나는 대로 공부했어요." ■가장 극적인 공부의 순간 공부와 관련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82년 4월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였다. '고교 재학 3주'가 배움의 전부인 그가 검정고시 관문을 스스로 열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입시 학원조차 못 간 처지에 검정고시에 한 번 만에 바로 붙어 제 또래들과 같이 대학에 진학할 자격을 갖게 된 것이 제게는 큰 사건이었죠." 내친김에 대학까지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장일을 그만두고 그해 6월 낙향했다. 대입 학력고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평창에 내려간 것이다. 군(郡)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으로 당시 유명했던 입시학원 문제집을 샀다"고 했다. 결국 국민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왜 내가 이 시대를 살아야 할지 답이 없었기에 무얼 하려고 해도, 목표를 정해 놓아도 집중할 수 없었다. 방황 끝에 찾은 답은 '나는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오발탄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고 선한 계획의 결과물이며 지금도 괜찮은 놈이다'였다. "그다음부터 무엇을 해도 신이 났고 두려움과 의심이 없어졌다"고 했다. 이후 학과공부를 열심히 했고 내심 대학교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방위복무 중 휴가를 받아 지도교수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교수님이 '학위를 받더라도 강단에 남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많은 고민을 하다가 대안을 찾았는데 그게 사법시험이었습니다." 복무를 마친 뒤 사법시험을 본격 준비, 이듬해인 1988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고 한 해 뒤 2차에 합격했다. 단기간 준비해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해 둔 덕도 있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는 믿음이 내면에 깔렸기에 가능했다. "공부에는 자신감만한 에너지가 없습니다. 사시를 준비하는 동안 '승리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확인할 뿐'이라는 글을 적어 책꽂이에 붙여놓았어요. 이런 자신감과 확신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인 확인에서 시작됩니다." ■공부 비결 이 교수는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이 공부 비결이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가'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게 되자 방황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됐고 공부목표와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도 갖게 됐다. 현재 그는 인생 후반의 '부활전'을 꿈꾸고 있다. 전공분야 연구는 물론 커뮤니케이션이나 심리학 분야의 지식을 좀 더 체계화할 생각이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제가 그랬듯 이웃들이 '긍정적 자기정체성'을 찾아 삶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이호선 교수가 권하는 공부 Tip 1. 새로운 내용을 배울 때는 시작 전 10분 정도 앞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며 워밍업하라. 2. 문제집을 풀지 않는다. 다만 공부할 뿐이다. : 객관식 문제의 답을 모두 달아놓고 공부하라. '~이 아닌 것은?' '틀린 것은?' '맞는 것은?'에 대한 선다형 문항을 읽으며 출제경향을 파악하고 '꼬인 문제'의 적응력을 키운다. 선다형 객관식 문항은 꽤 훌륭한 공부 요약본이다. 3. 목차와 색인을 복사해 곁에 두고 공부하라. 목차가 숲이라면 색인은 나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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