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동아일보-공간의 역사]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장윤규(건축) 교수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8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조선이 건국한 1392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한 폭 1m 길이 365m의 역사물길, 지상광장과 지하철을 연결하는 해치마당,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 바닥분수 등이 만들어졌다. 세종로는 태조가 한양을 건설하며 정부 관서인 육조와 한성부, 의정부 등을 양측에 배치해 58자 너비의 행정 중심 대로를 만든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이 거리를 ‘육조 거리’로 불렀다. 세종로 사거리에 해태(해치)상(像)이 있어서 ‘해태 앞’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중앙청 정문에서 황토현 사거리까지의 500m 구간을 도로로 정하고 세종의 탄생지인 준수방이 멀지 않다는 이유로 세종의 시호를 따 ‘세종로’로 이름을 바꿨다.》

엄숙한 ‘육조 거리’에 문화를 심다

1972년 시민회관 불탄후 6년만에 ‘문화메카’ 완공
한옥구조+현대미 조화… 주변과 연계안돼 아쉬움

현재의 세종로는 경복궁의 ‘역사’, 정부중앙청사 서울지방경찰청 종로구청 종로소방서 등 주요 기관의 ‘관공’, 미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핀란드 대사관의 ‘외교’, 현대해상화재 삼양빌딩 교보빌딩 등의 ‘기업’, 교보문고와 세종문화회관의 ‘문화’ 등 여러 가치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교차하는 애매한 공간이 됐다.
 
도시에서 길과 광장은 그 옆에 만들어진 다양한 건축 프로그램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종로에서 세종문화회관의 건립은 이곳을 문화의 거리로 강화하는 매우 특별한 시발점이었다.

원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다목적 홀인 서울시민회관이 있었다. 1972년 문화방송 가요 쇼가 끝나고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나 이 건물이 소실되자 정부는 대규모 설계 공모를 통해 시민문화센터 건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경복궁, 광화문과 연속되는 한국적 모티브를 건축에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은 건축가 엄덕문의 안이 당선됐다.

한국 건축은 1960년대부터 서구 모더니즘 스타일을 전통건축 요소와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조금씩 해답을 찾아나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성취는 한국 건축계를 강하게 흔들어 놓는 자극이 됐다. 한국 전통건축의 디테일은 이런 시류와 결합하면서 기묘한 유행을 만들어 냈다. 국립중앙극장을 비롯한 지방의 많은 문화회관과 예술회관이 마치 닮은꼴 형제처럼 지어졌다. 국립민속박물관, 독립기념관, 예술의 전당, 국립음악당 등이 이와 같은 ‘형식적 전통성’을 따랐다.

세종로를 면해서 계단과 결합한 기단, 열주(列柱)에 얹어진 처마 모양 지붕, 벽에 새겨진 문양도 전통을 현대화시키는 취지의 디자인이었다. 한옥의 구조 요소인 지붕, 기둥, 기단을 적당히 단순화해 변용한 것이다. 전통의 미적 가치가 서구 양식을 형태적으로 번안하는 데 그친 것이다. 공간, 물성(物性), 관념을 관통하는 조우가 아쉽다.

건축은 적절한 공간 프로그램을 담아내야 한다. 세종문화회관은 예전 좌석 중 800석을 없앤 3022석의 대극장을 갖고 있다. 한국 최대의 파이프오르간, 회전식 무대, 오케스트라 피트를 갖추고 전문적 공연을 수용하는 대형 시설이다. 기존 소극장을 리모델링한 세종 M씨어터, 실내악 전문 세종 체임버홀, 소극장 밑에 위치한 미술관, 건물 뒤편 가설무대 등 다양한 공간에서 복합 문화 프로그램을 수용하기 위한 크고 작은 변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변신의 노력은 획기적인 프로그램의 공연과 함께 ‘공간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건축의 가능성을 이어준다.

건축은 형태적인 이슈와 내부적 기능만으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다. 공간의 공공성을 높이는 역할이 건축적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도시의 중심을 향해 열린 세종문화회관 계단 광장과 뒤쪽 분수광장은 광화문광장과 연계되면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크게 발휘하고 있다. 건축의 문화적 변신은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큰 계기가 된다.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한 세종문화회관 인근 공간의 변화에는 아쉬움도 있다. 울창한 수목으로 가득 차 있던 기존 도로 분리대를 ‘광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확장한 것이 지금의 광화문광장이다. 하지만 결국은 도로 분리대의 근본적인 형식은 벗어나지 못했다. ‘더 널찍한 도로 분리대’가 됐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복궁과 광화문을 향한 거리의 ‘축’을 유지하면서 상투적으로 덧붙인 조경은 이 도시의 관료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78년 완공 뒤부터 세종문화회관이 들어간 풍경에는 늘 ‘나무’가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뿌리내린 예전의 수목을 다시 가져와 조경을 정비해 보면 어떨까.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의 중심이다. 건물 내부의 고품격 문화 프로그램과 걸맞은 외부 공간 프로그램을 자아낼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장윤규 국민대 교수·운생동건축 대표

원문보기 :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916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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