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그들의 새마을운동’ 저자 김영미(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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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1970년대 이전부터 자생… 朴전대통령이 깃발 꽃아” 6·25전쟁이 터졌다. 소년 소녀들은 다급했다. 그동안 모은 보리 이삭을 방공호에 숨기고 부모들과 함께 피란길에 나섰다. 돌아왔을 때, 다행히 보리는 그대로 있었다. 겉보리 15말. 도정을 하고 나니 5말. 보리쌀 5말은 소년단이 ‘칠원골의 기적’을 일으키는 기초재산이 됐다. 칠원리(현 칠원동)는 경기 평택에서 가장 못사는 마을, 관혼상제 용품이 없어 이웃 마을에서 사모관대와 족두리까지 빌려야 했던 마을이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천한 것들”이라고 멸시하던 그런 마을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소년단이 보리를 나눠줬으면 했다. 그러나 소년단은 거부했다. 그 대신 이웃 마을에 보리쌀을 빌려주고 이듬해 쌀 5말로 되받았다. 당시 통용되던 ‘장리(長利)’라는 농촌고리대 방식이었다. 10년 뒤 보리 5말은 백미 20가마로 불어났다. 그 사이 소년들은 20대 청년으로 성장했다. 먼저 14가마를 떼어 혼가용과 상가용의 병풍 2개, 족두리, 사모관대, 혼례용 가마를 구입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다시 30여 가마로 늘어나자 15가마를 팔아 꽃상여를 샀다. 꽃상여가 들어오던 날, 마을엔 축제가 벌어졌다. 청년들은 이발을 하고 가슴에 꽃을 달았고, 노인들은 기뻐서 춤을 췄다. 이젠 남보란 듯이 죽을 수도 있었다. 1970년 4월 22일, 국가 차원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칠원리는 1976년 최우수모범부락으로 대통령표창과 새마을기(旗)를 하사받는다. 칠원1리의 가구당 소득은 200만 원. 전국 으뜸이었다. 장호원 조합장 시절의 이재영 씨. 1948년 당시 15세였던 김기호(작고)가 단장을, 13세였던 이충웅이 총무를 맡아 소년단을 결성한 지도 어언 30년 가까운 세월. 55명의 소년 소녀들은 ‘1. 우리는 칠원의 아들딸 언제까지나 동리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타 동리에 지지 말자 3. 우리는 칠원을 모범부락으로 만들며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부촌을 건설하자’는 소년단의 맹세(盟誓)를 외치며 그 약속을 지켜냈다. 10여 년간 ‘박정희의 새마을’이 아니라 ‘그들의 새마을’을 찾아다닌 김영미 교수(국민대·국사학)는 재작년 ‘역사와 현실’ 별책에 칠원리 이야기를 실었다. “농촌근대화의 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이 전유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이며, 상식적인 이해일까?”라고 물으며…. 김 교수는 이미 ‘그들의 새마을운동’(2009년)이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이전에 이미 ‘새마을’이 있었다”라는 화두를 던진 터였다. 농촌사회 해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는 있었지만, 역사학자의 역사학적 접근은 김 교수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이미 ‘신화’가 됐다. 죽은 신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화가 돼 대한민국의 뉴 브랜드로 부활하고 있다. 갤럽의 건국 60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의 업적 중 88서울올림픽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박 대통령이 운동을 제창한 그날(1970년 4월 22일)은 올 2월 국회에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12개국이 한국형 새마을운동을 실험 중이고, 84개국 5만여 명이 새마을연수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새마을운동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요즘엔 도심 새마을식당에서도 ‘새벽종이 울렸네/새아침이 밝았네/너도나도 일어나/새마을을 만드세…’라는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일까. 22일자 어느 조간신문은 ‘41년 전 오늘, 중앙청 회의에서 시작된 운동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과연 새마을운동은 중앙청(옛 정부중앙청사)에서 시작된 운동일까. 첫 기념일 하루 전날인 21일, 김영미 교수를 만났다. ―칠원리 이야기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 와중에 우연히 알게 됐다고 썼던데…. “경북도민이거나 새마을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와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가 서로 ‘발상지’라고 다투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몇 년 전 경북도가 청도군 편을 들어주면서 청도와 포항이 법정 공방까지 벌였죠. 법원이 각하했지만 그 와중에 경남 동래군 기장면 만화리(현 부산 기장군 만화동)의 동서부락이 발상지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어요. 1960년대 도지사를 지낸 양찬우 씨가 동래군 일대에서 벌인 농촌운동이 모태라는 거죠. 그 직후에 제가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어떤 전화였습니까. “본인이 새마을운동 아이디어를 최초로 낸 사람이라는 겁니다. 1960년대 경기지역 엽연초생산조합 지도원이었던 우홍식 씨였는데, 연초 경작 농가에 기술지도를 하면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지붕개량이 중요하다. (연초 건조 때 사용되는) 석탄을 나르기 위해서는 마을길을 넓혀야 한다, 그런 사업은 응집력이 강한 마을 단위로 해야 하고 정부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계몽을 하고 다녔는데 1969년 평택 칠원리 강연 때 누군가가 그의 강연을 녹음해 군청에 건의했다는 겁니다. 그 후 군청 고위 관료가 찾아와 자세히 물은 뒤 아이디어를 준 공로로 당시 연초조합 배지를 새마을기(旗) 도안으로 사용하겠다고 했다는 거죠. 우 씨의 강연을 녹음한 사람이 바로 칠원리의 청년단장인 김기호 씨였습니다.” ―발상지 논란이 그렇게 복잡한 줄 몰랐습니다. “법원은 포항 문성리와 청도 신도리의 ‘발상지’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했습니다. 문성리는 새마을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라는 뜻에서 ‘발상지(發祥地)’라고 주장했고, 신도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구상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발상지(發想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다 부산 기장군 만화동까지 나섰으니…. 제가 경기 이천시 부발읍의 아미리와 장호원읍의 나래리 마을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새마을운동’을 펴내자 경기도청에서 ‘우리 경기도를 빛내줘 고맙다’는 전화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수해지역 시찰차 신도리도 방문했지만 문성리도 갔습니다.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렇게 되면 새마을운동은 정말 (민중이 아닌) 박정희의 역사가 됩니다.” ―책에서 새마을운동이 공식 시작되기 직전인 1969년 장호원단위조합을 창설한 이재영 씨가 ‘주인공’ 격으로 나오던데, 당시 최대 명문고인 경복고를 졸업하고 농촌운동에 뛰어든 그의 삶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좀 특수한 경우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재영 씨의 생애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존재했던 자생적인 농촌지도자의 전형입니다. 그분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 경험은 그 시기 농촌운동가들이나 ‘새마을 기수’들의 정신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당시 전국에는 무명의 농촌운동가들이 ‘퇴적’돼 있었습니다. 이재영 씨가 결성한 애향청년회 회원들이 3000명쯤 되는데 대부분 새마을 기수가 됐습니다.” 이재영 씨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1934년생인 이 씨는 경기 이천, 안성, 충북 음성의 꼭짓점 마을인 안성시 일죽면 금산리 상산전이 고향이고, 이 일대가 그의 평생 농촌활동 무대가 된다. 김 교수는 “1930년대 생은 보통학교나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근대화 1세대’이자 청소년 시기에 식민지, 광복, 전쟁을 경험한 하나의 ‘역사세대’였다”고 말한다. 이 씨는 장호원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 “경복고 시험만 합격하면 입학금과 수업료를 주겠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경복고에 입학한다. 서울시학도연맹회장까지 맡았다. 그러나 2학년 때 어머니가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한다. 경복고를 졸업하자마자 문맹 퇴치, 도박 근절, 폐풍 개선, 협동조합운동의 4가지 목표를 내걸고 ‘애향청년회’를 만드는 한편 전국에 계몽강연을 다녔는데, 50∼60리를 걸어 새벽 1시에 마을에 도착해도 청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농촌근대화 1세대들의 열의가 뜨거웠다고 한다. 그는 박 대통령의 월간경제동향 보고회에서 자신의 ‘1차 5개년 계획’ 사례를 발표한 사람으로, 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 연설문 자료집에서 새마을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청와대에 신설될 새마을담당관실을 맡아달라고 했으나 그는 대신 훗날 농협중앙회장을 지낸 한호선, 건국대 총장을 지낸 류태영 씨를 추천했다. 류 씨는 그 직후 새마을담당 비서관으로 발탁된다. 이 씨는 새마을운동이 농민의 ‘자조(自助)’보다는 정부의 ‘지도’ 중심으로 흐르며 백미(白米) 대신 칠분도를 강제하는 절미시책까지 나오자 전국농협대의원대회에서 “실제로는 낭비가 더 많고 부정부패의 원인이 된다”고 비판해 ‘난리’가 일어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점점 권위주의적 정부시책으로 흘러가면서 ‘성패 논란’도 거세어졌죠? “건설경기 하락과 수출 부진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시멘트를 전국 3만3267개 이(里)·동에 335포대씩 배포해 불꽃을 일으킨 박 대통령의 기발한 발상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나눠줌으로써 한국 농촌마을 고유의 ‘공동체적 자치력’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영도력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재영 씨 같은 농촌지도자, 칠원리 소년단 같은 무명의 개척자들이 일궈내고 있던 ‘새마을’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새마을운동에 관한 논의는 선후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국가기념일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런 인식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식 변화 없이 새마을운동을 단순히 ‘잘살기 운동’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말 잘살게 됐는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마을운동이 경과하면서 농가부채는 급증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 새마을운동을 ‘눈속임’이라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10425/36666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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