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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송나라 사신 서긍 “왕씨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⑤ 왕조의 뿌리/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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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굴된 ‘지안고구려비’의 진위 여부를 놓고 지난 3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학술회의는 비를 발견해
분석한 중국학자까지 참석했지만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났다(중앙일보 4월 15일자 ‘고구려비 논란만 더 키웠다’ 기사
참조). 930년 후백제와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크게 사기가 오른 고려는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932년(태조15) 중국 후당(後唐:923~936년)에 사신을 보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후당은 이듬해 3월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보낸다. 『고려사』에는 왕건 및 처 유씨(柳氏)의 책봉조서, 책봉과 함께 물품을 보낸다는 조서, 3군의 군사에게 국왕 책봉을 알리는 조서 등 모두 4통의 조서가 실려 있어(권2 태조 16년(933) 3월조 참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고려도경』이 동북공정 오류 보여줘 고려가 기자조선과 고구려를 이어 건국됐다는 구절은 오히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려준다. 그런 사실을 기록한 후당의 조서야말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경도된 중국 학자들에게나 세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읽힐 뿐이다. 그런 잘못된 시각만 걷어내면 위의 기록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도 고려는 우리나라 땅을 침식해 들어와서, 거란이 침략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고려의 서희(徐熙)는 “아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은 모두 우리 영토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고려사』권94 서희 열전) 동북공정식의 논리라면, 서희의 얘기처럼 고구려 땅에 건국한 고려야말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알려주는 더없이 좋은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영토와 의식의 차원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서희의 얘기를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서희뿐만 아니다. 고려·거란 전쟁 뒤 100년이 지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후당) 명종에게 봉작을 청하자, (명종은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봉했다.” (『고려도경』 권2 왕씨조(王氏祖))라고 했다.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릴 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왕건의 조상을 ‘고구려 대족의 후예’라 했다. 또한 고구려 국왕의 성씨인 고씨(高氏)를 이어 왕건이 국왕으로 추대됐다는 표현 속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반영돼있다. 이런 기록들을 무시하고, 왕건을 중국인(漢人)의 후예로 본 것은 사료 해석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다. “고려왕실은 동이족 중 명문거족” 반론 그런 점에서 왕건의 출신을 ‘장회무족’이라 한 구절은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얻게 된다.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동이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나라와 항쟁하면서 점차 하류 지역으로 내려온다. 동남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동이족은 한(韓)·예(濊)·맥(貊)족으로 갈린다. 산둥 반도 쪽으로 이동한 동이족은 우이(嵎夷:청주(靑州)지역, 동부연안), 내이(萊夷:등주 지방), 회이(淮夷: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서융(西戎: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노(魯)의 동남지역)이 된다. 특히 회이와 서융은 서주와 춘추시대 한족(漢族)과 대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돼 전국시대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서융은 기원전 515년에 오(吳)나라에 망한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동이족은 한족(漢族) 사이에 분산 배치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김상기,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1954). 후당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후당(後唐:923~936년)은 13년짜리 단명 왕조다. 고려왕실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질 형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후당은 당시까지 중국에 전해오던 동이족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책봉조서에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가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려는 막바지에 이른 후삼국 통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후당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들과의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왕건의 본관을 동이족이 번성했던 회수지역과 연결시켜 그렇게 작성했을 수 있다. 대체로 그런 유의 책봉조서는 상대국을 존중하여 그들이 보낸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오히려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중국에서 번성했던 모습을 확인한 셈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연구와 서술에서 이런 사실들이 강조되지 않았던 현실이 동북공정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준 건 아닐까 반성해본다.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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