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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⑦ 식민사관의 계략/박종기(국사학과) 교수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고려 왕조 통치 강령이며, 오늘날 헌법에 준할 정도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훈요십조는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이 지난 현종 때(1010~1031년 재위) 현종의 측근인 경주 출신의 신라계 정치인 최항(崔沆)이 작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18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기한 ‘훈요십조 위작설’이다. 위작설이 훈요십조 가운데 문제 삼는 구절은 8조이다.

“여덟째,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면,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다.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역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비生亂).”

이마니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 지역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라는 점을 전제로, 왕건이 나주 출신 부인의 소생을 태자(뒤에 혜종)로 삼은 사실을 들어 왕건이 8조와 같은 내용을 작성할 리 없다고 했다.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가 인종과 의종의 외척인 사실과 최지몽·유방헌·김심언·전공지 등 이 지역 출신 인물이 고려 전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도 그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금지 대상은 특정지역 아닌 反통합 인물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왕건)가 남긴 훈요십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조(聖朝*조선 왕조)의 기반은 전주인데,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줄만 알았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성호사설』권12 人事門 ‘麗祖訓要’)

성호 이익은 전주 출신인 이성계의 조상들이 함경도 여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등용을 금지한 훈요십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은 풍수지리설을 유포한 도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금강의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모양이라서,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조).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1690~1752)도 같은 생각이었다.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이 지역(*전라도)을 차지하고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서, 태조는 자주 위태한 경우를 당했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길(*금강)은 모두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조)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반궁수’론을 이어받아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背流水)라고 덧붙이고 있다. 참고로 섬진강·영산강·낙동강도 그러해서, 우리나라 3대 배류수에 해당한다(『고려사』 지리지 양주(梁州·*양산)조 참고).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만 배류수로 본 것일까?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과 이중환처럼 볼 경우 이 지역(금강)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포함된다. 전라도로 국한한 사실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마니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빌려 위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8조를 다시 읽어보자. 금지된 대상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삼한 통합에 반감과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을 등용할 경우 뒷날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했다. 반감을 품은 사람들의 지리적 범주를 ‘차령 이남, 공주 밖’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현재 학계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통합전쟁에서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홍성(당시 운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 가운데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의 등용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8조는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과 함께 많은 기록들이 불탔다. 이 속에 훈요십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1013년 9월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해, 1034년(덕종3) 일곱 국왕의 7대실록 36권이 완성된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십조도 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발견돼 새로 편찬된 『태조실록』에 수록된 것이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다(『익재집』권9 ‘충헌왕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 친서이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을 말한다. 훈요십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즉 훈요십조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 사이에 비전(秘傳)된 통치의 지침을 담은 내부용 문서다. 약 100년이 지나 다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 자료로 공개된 것이다.

최항은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뒤 현종의 스승과 재상을 역임한 측근이다.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온 훈요십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종은 죽기 직전 최항에게 신왕 현종을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왕실에 전래된 훈요십조를 현종에게 전하라는 부탁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7대실록 편찬 책임자인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훈요십조를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흥왕사는 덕수현(德水縣)이라는 하나의 현을 옮기고, 그곳에 짓기 시작해 12년 만인 1067년(문종21)에 완공된 고려시대 최대 사찰의 하나다. 건립을 주도한 문종에 대해 관료집단은 크게 반대한다.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태조 신성(神聖)왕의 훈요십조에,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사원을 세울 만한 곳에 짓되, 후세의 국왕 및 공후(公侯) 귀척(貴戚) 후비 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폐하의 고려는 선조의 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태평한 상태입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여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고려사』권95 최유선 열전)

최유선은 신라가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해 망했다는 훈요십조 2조에 근거해 문종의 흥왕사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 이런 사례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고려 당대인도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일종의 헌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위작으로 몰아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역사의 출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위작설에서 제기된 지역 차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차별의 역사적 근거를 훈요십조의 8조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역 차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훈요십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계 연구 성과의 축적으로 8조는 지역 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임이 판명되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086&cat_code=061410&start_year=2013&start_month=02&end_year=2013&end_month=05&press_no=&page=1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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