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최태만(회화전공) 교수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38> 거리로 나선 예술가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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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예술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기성제도의 권위에 대한 부정과 도전을 들 수 있다. 현대성을 상징하는 속도는 물론 전쟁과 같은 폭력을 예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도서관을 악취나는 괴질로 매도하며 불태워야 한다고 선동했던 미래주의나 제1차 세계대전이란 전대미문의 폭력을 겪으며 나타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정의 정신'이다. 비록 폭력적인 양상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1967년 12월 '무(無)동인' '신전(新展)동인' '오리진'이란 세 미술단체가 연합해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 개막을 앞두고 참여 작가들이 벌인 시위 형식의 퍼포먼스는 보수주의의 이상이 된 국전에 대한 비판이자 당시 한국 문화예술정책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행동하는 화가' '추상 이후의 작품' '생활 속의 작품' '현대회화는 대중과 친하다' '좌상파(坐像派) 국전'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 등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 이들은 한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청 앞을 지나 세종로를 거쳐 종로2가와 삼일로, 소공로로 이어지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무동인'이나 '신전동인'에서 활동하며 보다 격렬한 실험미술을 펼쳤던 작가들이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에 참가한 반면 기하학적 추상을 지향하던 오리진의 멤버였던 서승원은 자신의 작품을 들고 이 행진에 가담했다. 당시 기사에서 '미니 스커트에 부츠를 신은 두 아가씨까지 행진대에 끼여 행인들의 시선을 충분히 잡아끌었다'라고 쓸 정도로 미술가들의 집단 퍼포먼스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재는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는 국회 앞을 거쳐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교통경찰이 행진을 제지했고, 일부 작가들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의 문구였다. 좌상파 국전이란 구태의연한 구상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국전에 대한 비판이었다. '생활 속의 미술' '현대회화는 대중과 친하다'는 문구는 현대미술, 특히 실험적인 미술은 낯설고 난해하다는 통념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과 안타까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십시오, 무료입장'이란 친절한 문구를 적은 피켓도 행진 속에 섞여 있었다. 1960년 '벽동인회' 등이 덕수궁 돌담에서 열었던 가두전시가 4·19 민주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기성미술계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의 가두시위는 5·16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정권이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에 펼쳐졌다. 식민지배에 의한 수탈과 6·25전쟁이 남긴 폐허, 독재정권의 부패와 절대빈곤이란 유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경제 개발을 추진하면서 나타나는 사회의 급속한 재편에 따른 갈등과 노동 문제, 남북의 긴장은 물론이거니와 월남 파병 등 당시로서는 청년세대가 고민해야 할 민감한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미술 내적인 문제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가두시위를 현실참여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상아탑을 거부하고 실험미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의미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원문보기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20220.22020191134 출처 : 국제신문 기사입력 2012-02-19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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