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조선일보][집이 변한다] 3층 수직벽에 가득, 책이 집이다/봉일범(건축학전공) 교수

[봉일범씨의 파주 '책의 주택']
아이들, 마음껏 책 뽑아 읽게 6m 높이에 1만권 책장 배치
책장 사이는 계단으로 연결… 손님들 "도서관이야 집이야?"

독서광(狂)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에 파묻혀 밤을 꼬박 새워 본 청춘이라면 한 번쯤 이런 환상을 품었을 것이다. '책 수만권이 가득 꽂힌 커다란 서재가 있는 집'. 하지만 규격화한 아파트와 방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선 많은 애독서는 규격화한 책장 안에 '구겨 넣어지고', 오래된 책은 창고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간다.

"집 한쪽 벽 전체를 아예 거대한 책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봉일범(43)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해 동갑내기 부부 황석주(39)·조유경씨로부터 "책을 많이 보관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책을 뽑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의뢰를 받은 뒤였다. 최근 경기도 파주 운정지구의 건축주 집에서 만난 봉 교수는 "작지만 자존심이 세고 재밌는 집을 만들고자 했다"고 했다.

실제 이 집의 크기는 작다. 1·2층과 다락의 연면적은 149.16㎡(약 45평·다락방 포함). 거실과 화장실·주방으로 구성된 1층 바닥 면적은 50.15㎡(약 15평)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런 숫자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왼쪽 벽면에 1층 바닥부터 지붕 꼭대기까지 공간을 틔워 3층 형식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책장 때문이다.

높이 약 6m·폭 5m의, 시집(詩集) 기준 총 1만권을 꽂을 수 있는 책장. 자작나무 합판으로 100여칸의 구획을 짰다. 책장은 크게 3층으로 나뉜다. 1층 거실 벽면,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뻗어나와 있는 통로의 벽면, 2층과 다락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뻗어나와 있는 통로의 벽면으로 구성된다.

"집에 온 사람마다 '여기가 도서관이야, 집이야?'하며 놀라요. 지난해 12월 이사 왔는데, 100가지 재미 중 아직 10가지도 탐험하지 못한 것 같아요." 건축주 부부는 신혼 초를 제외하곤 지난 8년간 줄곧 서울 시내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두 남매 지우(9)·윤우(6)를 낳아 길렀지만 아이들이 자랄수록 부부의 아쉬움은 커졌다.

 

"아파트 생활이 특별히 불편하거나 불만스러운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겐 결혼 전부터 꿈꿔온 판타지 같은 게 있잖아요. 아이들은 온 집안과 마당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우리는 큰 서재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뽑아 뒹구는 그런 꿈…." 지난해부터 전원주택 신축에 대해 알아본 부부는 인터넷 카페에서 건축가를 물색하다 봉 교수를 알게 됐다. 공사비는 평당 400만원 정도 들었다.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1~3층의 생활공간은 물론 책장과 책장 사이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좁은 '계단'이다. 봉 교수는 "계단식으로 책장을 올렸고, 한 층의 책장이 끝나는 지점에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배치했다"며 "이 계단이 아이들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공간이 된다"고 했다. 책장 한가운데에 뚫린 1m 크기 창문 턱도 독서삼매경의 주된 공간. 실제 지우·윤우 남매는 이곳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책장을 벽 전체에 길게 짜 넣으면서 방은 더욱 내밀(內密)해졌다. 계단에 집의 주요 자리를 양보하면서 부부와 아이들 방이 2층 집안 구석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부부는 10여년 만에 둘만의 방을 갖게 됐고, 딸 지우는 매일 밤 별빛이 쏟아지는 비스듬한 창이 딸린 방에서 자게 됐다. 조유경씨는 "예전엔 하루종일 애들 뒷바라지를 하다 보면 집 안에만 있는 게 무척 답답했는데, 공간이 위로 길게 트인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 힘이 덜 든다"고 했다.

계단식으로 짠 책장과 다락방 때문에 집 외관은 북쪽 지붕과 아래, 남쪽 지붕 등 3곳이 직선으로 깎은 모양이 됐다. 지우·윤우 남매는 이걸 두고 "사과를 세 입 베 물어 먹은 것 같다"고 말한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06/20120306029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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