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조선일보] "기고" 일본, '大正 데모크라시'의 실패 반복하나/한상일(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일본의 침로(針路)가 흔들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敗戰) 후 새롭게 국제사회에 등장한 일본은 부국민주(富國民主)와 평화를 국가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그 틀 속에서 정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고, 평화헌법을 방패로 국제분쟁에 휩쓸리지 않고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소련·한국·중국 등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피해국들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謝罪)'와 '망언(妄言)'이 반복되기는 했으나, 198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은 이웃과의 선린(善隣)과 역사 인식의 공유를 지향했다. 역사 기록에 좀 더 신중하겠다는 미야자와 기이치 담화(1982년), 일본군위안부의 모집·이송·관리에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한 고노 요헤이 담화(1993년),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주변국들에 피해와 고통을 준 데 대한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담화(1995년)가 이를 보여주었다. 또 2010년 한국 병탄 100주년을 맞아 간 나오토 총리는 한국인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가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에 '통절(痛切)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기존의 국가 진로를 부정하고 역(逆)코스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다음 정권은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나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재, 일본유신회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가운데 한 사람이 담당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영토 확장을 강조하며, 헌법 개정을 실현하여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것을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30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초조감에 짓눌려 있는 국민감정에 '폭력적 애국주의'의 불을 지피고 있다.

1999년 영국 런던정경대의 모리시마 미치오 석좌교수는 '일본은 왜 몰락하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경제학자이면서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지녔던 그는 1990년의 상황에서 2050년을 내다보면 일본에는 '몰락' 이외의 다른 길이 없고, 그 '몰락'의 이유는 '정치의 무능과 빈곤'이라고 지적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에서 본다면 모리시마의 관찰과 예견은 상당히 적중하고 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일본 정치의 현주소는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한 1989년 이후 23년 동안 18명의 총리가 교체됐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5년 반 집권을 제외하면 일본 총리의 평균 수명은 1년에 불과하다.

일본은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정치의 위상을 빨리 복원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본질적인 혁신과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정치 지도자가 성장할 수 있는 정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 특유의 파벌·세습과 정치의 폐쇄성은 능력과 자질을 가진 인재들이 경쟁과 타협 속에서 정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파가 어긋나도 국회가 작동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고, 잦은 의회 해산과 총리 교체를 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앞으로 일본을 이끌고 갈 전후(戰後)세대 정치 지도자들은 철학의 빈곤과 리더십의 부재 위에 서있던 19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가 1930년대의 쇼와(昭和) 군국주의로 넘어가게 된 과정을 되새겨보고, 그 결과가 어떠했나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정치의 무능과 빈곤 속에서 신팽창주의를 바라는 '강한 일본'은 동아시아는 물론 일본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국가 진로가 아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6/2012101602904.html

출처 : 조선일보 기사보도 2012.10.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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