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헤럴드경제] "휴먼다큐" 이선재 교장/정치학과(61) 동문

6·25 때 피란 온 나를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 이들의 선의에 보답하려 야학 열어…우연한 기회에 일성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 부임

주부들 누구 하나 사연 없는 사람 없어 ‘배움의 恨’ 알면 알수록 마음 아파…뒤늦게 용기낸 그녀들에게 작은 일에도 칭찬하며 성취감 심어주려 노력

CEO·박사·미국 사립대 총장까지…졸업생들 다양한 분야서 자기목소리 내며 사회에 기여하고 후배들에 희망 심어줘 뿌듯

50대 중년여성에 10대 교육과정 요구하는 정부 보면 안타까워… ‘우리학교가 없어져도 되는 그 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게 꿈


야학 운영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무렵, 뜻하지 않은 일과 마주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던 일성고등공민학교가 건물 임대료를 1년치 이상 내지 못해 쫓겨나 수백명의 아이들이 이른바 ‘노천 수업’을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 한 걸음에 달려가 아이들에게 교실을 되찾아주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고 지인의 도움으로 급한 재정난을 막을 수 있었다.

학교 측은 이 교장에게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야학이 아닌 학교를 맡는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진명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고(故) 이세정 선생을 초빙해 9년 동안 교장으로 학교 운영을 부탁했고 이 교장은 뒤에서 물심양면 도왔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세정 선생이 교장직을 맡은 지 10년째 되던 해 작고하면서 그는 일성고등공민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게 됐고 그렇게 지난 50년을 보내왔다. 

#“우리끼리만 공부하게 해주세요”

1970년대 후반부터 학교에 어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여공(女工)들이 많았다. 공장에서 옷 라벨을 붙이는데 도통 영어로 된 단어를 읽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던 여공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찾은 것.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원서 접수를 받으면 경쟁률이 3대 1, 4대 1을 훌쩍 넘는데 정작 등록을 시작하면 미달 사태가 속출했던 것. 사정을 살펴보니 공장 일을 하면서 평일에 이뤄지는 수업을 참석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공부하러 간다’는 여공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장들의 반대도 한몫 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 이 교장은 1978년 이들을 위한 무료 일요학교를 만들었다. 매주 일요일에만 오전부터 오후까지 영어 등의 수업을 연달아 제공했다. 반응은 매우 좋았다. 청소년들이 공부하던 고등공민학교에 공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림에만 매달렸던 동네 주부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주부들이 많이 몰려드니 새로운 요구도 생겨났다. 남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다는 것이 못내 불편하고 어색했던 이들이 이 교장을 찾아 ‘발칙한’ 제안을 했다.

“어느날 학생들이 나한테 찾아와 말하더라고요. 우리끼리만 공부할 수 있는 반을 따로 만들어달라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는 거예요. 쉬는 시간이면 사내 녀석들이 칠판지우개를 던지고 노는 등 난리법석인데다가 또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여성들 입장에선 불편했던 거지.”

결국 이 교장은 주부반을 개설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주부반’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1982년부터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985년 일성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 학력 인정이 가능한 일성여자상업학교로 변화하고, 또 1987년까지 운영되던 주부반은 1988년 양원주부학교가 개교하면서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주부학교로 승격됐다. 2001년에 일선여자상업학교가 2년제 학력인정 학교인 일성여자중ㆍ고교로, 2004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성인 대상 학력인정 초등학교인 양원초교가 연이어 개교했다.


#‘빨간 색연필로 ‘100점’ 써주는 이유는?

우연히 접하게 된 주부들의 배움의 한은 알면 알수록 이 교장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매년 수천명씩 지난 수십년간 4만9000여명에 달하는 학생을 만나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 하나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개인 혹은 가정 사정으로 시기를 놓쳐 배우지 못한 한 때문에 어깨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들에 눈물짓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고졸이라고 속이고, 길거리 간판에 쓰여진 영어 단어를 읽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며 노심초사하며 지내온 거지. 심지어 가족에게도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아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온 여성들이지만 정작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만 남아버린 현실. 이 교장은 용기를 내서 공부를 시작한 이들에게 무엇보다 ‘성취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방법은 사실 어렵지 않다. 시험을 통과해 성과를 이룰 경우 그 성과가 크지 않을지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교사들에겐 수업 시간마다 진행되는 쪽지시험을 채점할 때도 빨간 색연필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빨간 색연필을 이용해 정답을 맞힌 문제는 크게 동그라미를 쳐주고, 만점을 받았을 경우엔 시험지 앞머리에 ‘100점’이라고 크게 쓰라고 선생님들께 당부합니다.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거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경우 ‘상(賞)’이라고 쓰인 도장을 찍기도 하고 각종 학용품 등을 상품으로 지급하기도 하죠. 우리 학생들이 살면서 100점 시험지를 받아본 적이 많이 없거든요.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매우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그 도장 받으려고 방학 숙제를 얼마나 열심히 해오는지 몰라요. 주눅 들어 지내던 지난 세월을 잊고 성취감을 쌓아가는 거죠.”

일성ㆍ양원 학교에서 운영 중인 일명 ‘다관왕제’라는 독특한 제도도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한자, 컴퓨터, 영어, 글쓰기 학습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이 교장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졸업 때까지 ▷한자 훈음 읽기 능력 급수시험 특2급(3000자) ▷한자활용급수시험 1급 ▷사자ㆍ고사성어 경시대회 교과서 외 2과정 ▷간체자 읽기 능력 급수시험(900자) ▷펜글씩 국가공인 1급 ▷전국 규모 백일장 대회 입상 ▷워드프로세스 2급 이상 ▷ ITQ(정보기술자격) A 등급 이상 ▷생활영어 1000개 문장 암기 등 총 9개 분야를 목표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이 한 분야씩 기준을 달성할 때마다 1관왕의 영예를 부여한다. 학생들은 9관왕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을 다해 공부를 한다.

“영어의 경우는 한 번에 12개 문장씩 외워요. 반복되다 보면 100문장, 1000문장까지 외우게 됩니다. 이렇게 생활영어 문장을 암기하니 대학에 진학해서도 원어 강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젊은 학생들과 경쟁해 장학금까지 타더라고요. 나이가 많아도 ‘하면 된다’는 진리를 학생들이 보여주고 있어요.”

늦게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인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게 이 교장의 주요 교육 방침 중 하나다. 양원ㆍ일성학교의 학생들은 팝송, 시낭송, 동화구연, 국악, 영어연극 동아리 등에서 활동한다. 매년 팝송대회, 영어연극대회 등이 열리고 늦깎이 학생들은 마치 학예회를 준비하는 어린 학생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대회를 준비한다. 

교실 안에서 이뤄지는 작은 대회가 아니다. 서울 마포아트센터 등을 대관해 수백명의 지역 주민과 가족들을 관객으로 초대해 펼치는 대공연이다. 학생들에겐 큰 무대에 서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설렘의 시간이다. 공연의 수준은 아마추어일지 몰라도 매번 진한 감동이 가슴을 울린다.

“지난 20일에 개교 60주년 기념회를 했는데 올해 환갑이 넘은 양원주부학교 학생이 팝송을 불렀어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 공부를 못하다가 우리 학교에 와서 2년 반 만에 중ㆍ고교 과정 마치고 검정고시까지 합격했는데 팝송대회까지 나올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며 감격스러워 하더라고요. 우리 학교 아니면 자신이 어느 곳에서 이런 행복을 얻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데 저도 무척 행복했습니다.”


#6년 연속 대학 진학률 100%

양원ㆍ일성학교의 학생들은 하루하루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어 단어만 읽을 수 있어도 좋겠다’던 소박한 소망이 자격증 취득, 대학 진학으로 이어지고 사회 각 분야의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한다. 

일성여고의 경우 지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연속 대학 합격률 100%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300여명의 고3 학생 중 187명이 수능을 치렀는데 모두 수시ㆍ정시 등을 통해 합격했다. 만학도 전형을 통해 입학하는 경우도 대부분이지만 일반 수시 전형 및 입학사정관 전형 등에서 논술, 면접 등을 치르며 젊은 수험생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리는 경우도 많다. 시인, 관광 가이드, 사회복지사 등 학생들의 진로 설계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이 교장의 도움으로 늦게 배움의 길에 접어든 제자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린 저명인사들도 많다. 놀부보쌈 김순진 대표이사는 39세의 나이에 양원주부학교에 입학해 뒤늦게 배움의 뜻을 펼쳐 54세의 나이에 관광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다.

“박사가 된 학생들도 있고 미국에 가서 작은 사립대를 세워 총장이 된 분도 있어요. 다들 우리 학교에서 뒤늦게 얻은 배움의 기회를 통해 사회에 진출하고 각 분야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거죠. 그분들이 후배들에겐 자랑이 되고 또 희망이 됩니다.”


“우리 학교가 ‘없어져도 될’ 그날을 위해…”

평생을 학교와 학생을 위해 힘써온 이 교장의 꿈은 양원ㆍ일성학교가 “없어져도 되는” 날이 와서 명예롭게 은퇴를 하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배움의 기회를 놓친 많은 기성세대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마음 놓고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해 민간에서 더 이상 학교를 만들어 교육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이 교장은 꿈꾸고 있다.

“지금의 청년들이 풍족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배경에는 절약하고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인생을 바쳤던 이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선진국이 됐다면 이젠 그분들의 희생을 바라볼 때가 됐어요.”

정부에도 아쉬움이 크다. 일성여중ㆍ고교와 양원초등학교가 학력 인정 기관이라는 이유로 교육청 등 교육당국이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정규 공교육 과정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부들도 일반 중ㆍ고교 학생들처럼 체육 수업을 받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다. 체력 신장 및 정신력 강화 등을 목적으로 하는 체육 수업을 평균 연령이 50대 이상인 중년 여성들에게도 적용하라는 교육 당국의 요구가 이 교장은 그저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매년 줄어들기만 하는 성인문해교육 예산도 문제다. 2007년 개정된 평생교육법에 따라 문해교육에 20억원의 예산이 마련됐지만 현재는 15억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국의 300여개의 성인대상 평생 교육 기관들이 수혜 대상이다. 

“현행법상 모든 국민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학령기를 놓친 많은 기성세대들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기엔 여전히 어려움이 많아요. 차기 대통령은 평생 교육, 평생 학습의 참된 의미를 깊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사회도 없었음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원문보기 :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1129000533&md=20121129115457_AN

출처 : 헤럴드경제 기사보도 2012.11.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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