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선데이] 싸움꾼 왕건, 팔공산 전투 지고도 천하를 얻다 / 박종기 (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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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의 아버지 태조 왕건(877~945년)은 왕이 되기 전엔 백전노장, ‘천하의 싸움꾼’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왕건의 진면목과
고려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896년 스무 살의 왕건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20여 년간 싸움판을
전전하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다. 이것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무려 18년 동안 견훤의 후백제, 통일신라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뤄 60세인 9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다. 69세까지 살았지만 싸움판을 오간 게 꼬박 40년이다. 5000 군사 전멸하고 왕건 혼자 살아남아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27년 태조가 견훤과 공산동수에서 싸웠는데,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했다. 그때 신숭겸이 대장이 되어 김락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태조는 애통하게 여겨,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에게 모두 원윤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고려사』 권92 신숭겸 열전)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내용은 밋밋하다. 오히려 수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이라는 TV드라마의 내용이 더 흥미진진한데, 이 전투에서 신숭겸은 태조를 탈출시킨 후 태조의 옷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허구이지만 천년 후 재생된 신판 ‘도이장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원판 ‘도이장가(悼二將歌)’를 보자. 1120년(예종15) 10월 서경(평양)에서 열린 팔관회 행사 때 예종이 행사에 등장한 신숭겸과 김락의 우상을 보고 그들의 충절을 기린 노래이다. “님(*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양주동 박사 번역;『평산신씨 고려대(태)사 장절공 유사』 수록) 두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갈채일까? 아니면 최후의 승자인 왕건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노래일까? 두 장수의 충절은 고려 500년 내내 칭송되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신숭겸의 죽음은 ‘장절도(壯節圖)’란 그림으로 남아서 전한다. 그러나 이 노래에 담긴 팔공산 전투의 의미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 왕건은 패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히려 승리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역설이다. 이해(927년) 12월 승리에 한껏 고무된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날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려사』 권1 태조10년 12월조 인용) 930년 고창군 전투도 후삼국 전쟁 분수령 신라 국상 김웅렴이 왕건을 경주로 불렀다는 표현은 두 나라 동맹을 깨기 위해 견훤이 전략적으로 신라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작은 자라와 종달새에 불과한 고려가 큰 자라와 매인 신라의 품에 안기려 한다면서, 왕건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 후 펼쳐진 후삼국 전쟁에서 견훤이 도리어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공산 전투에서 정통왕조에 잔악한 행동을 한 견훤에게 여론의 따가운 화살이 쏟아진 것이다. 견훤은 내심 이 전투의 승리에 놀란 성주와 장군들이 두려워 그에게 붙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심상치 않았다. 그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건, 자신의 신라 침공은 신라와 동맹한 왕건의 잘못 때문이라며 왕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견훤은 편지의 다른 구절에서,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고 의리에 충실하고, 신라에 대해 우정과 의리가 깊다’라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쇠잔한 신라를 만만하게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정통왕조라는 상징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건은 928년 1월 견훤에게 보낸 답신에서, ‘서울(경주)을 곤경에 빠뜨리고 신라 대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 왕실을 높여야 하는데, 그대는 기회를 엿보아 신라를 뒤엎으려 했고, 지극히 높은 신라왕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했다’(『고려사』 권1 태조 11년 1월)고 비난한다. 왕건 역시 여론을 의식해 신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역사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고려는 정통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한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존왕(尊王)주의를 내세워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고창군 전투는 이런 신뢰를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돼 천하 대권을 놓치는 자충수를 두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9598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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