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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덕종 “보주성 탈환” 외치다 18세에 의문의 죽음/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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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분쟁’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같은 영토분쟁이 고려 때도 있었다. 1014년(현종5) 거란이 압록강 동쪽 고려 영토인 보주(保州·지금 義州)성을 점령한 뒤 고려가 이곳을 되찾은 건 100여 년 뒤인 1117년(예종12)이다. 거란이 보주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점만 다를 뿐 장기간에 걸친 영토분쟁이란 점에서 독도 영유권 분쟁과 다를 바 없다. 분쟁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거란 침입 대비해 압록강변 천리장성 축조 덕종이 즉위 4년 만에 숨지자 상황은 급변한다. 전왕의 동생 정종(靖宗고려 제10대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035년 거란은 외교관계의 재개를 요구한다. 여러 차례 교섭 끝에 1039년(정종4) 두 나라는 보주 문제에 타협하고, 8년간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선왕(성종)의 유지(遺志)를 거스를 수 없다는 구실로 거란은 보주성 반환을 여전히 거부했다. 대신 이곳에 고려인의 농경과 정착을 허용한다. 보주성을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고려가 농민의 경작과 정착권을 획득한 건 거란의 보주성 영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언제든 반환의 불씨를 살릴 근거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떻든 보주성 영유권 문제는 긴 시간을 요하는 장기 과제로 남긴 셈이 되었다. 보주성 문제가 8년 만에 타협론으로 급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신의를 지킬 수 없어 태조(왕건)가 그들을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대연림(大延琳)의 난(발해의 후신인 興遼國을 건설한 일)을 계기로 거란과의 구호(舊好)를 버리는 것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反正)하매 미처 겨를이 없었다. 덕종은 어리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경계해야 했다. 왕가도가 (거란과) 화친의 의리를 끊자는 주장은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황보유의의 주장보다 좋지 않다.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만에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사신으로 가고, 4년에 거란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왔다. 이때부터 (고려와 거란은) 다시 화평을 유지했다.”(『고려사』 권5 정종 12년, 이제현의 정종에 대한 史評) 이제현(1287~1367년)은 정종 때의 타협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원나라와 고려의 원만한 관계를 희구한 원 간섭기 지식인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평가다. 그런데 위의 글을 읽어보면, 타협론이 나오기까지 매파를 대표한 왕가도의 단교론(斷交論)과 황보유의의 화친론(和親論)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종은 거란에 보낸 문서에서 ‘보주성 반환 주장은 전왕(덕종)이 제기한 것’이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거란과 타협한다. 즉 보주성 문제와 거란 관계의 재개는 별개라는 논리다. 정종의 즉위와 타협론의 득세 뒤에는 고려 정국 내부에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1224~1300년)는 『제왕운기』에서 “덕종은 어찌해서 (재위기간이) 4년에 그쳤는가? 봉황이 와서 태평성세를 송축하네”라고 당시 역사를 시로 읊었다. 『고려사』 등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덕종 때 강경론을 주도한 정치세력의 몰락이 덕종의 죽음을 재촉했고, 이후 정국이 안정을 되찾은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덕종의 장인으로 정국을 주도한 왕가도가 1034년(덕종3) 5월 사망하고, 덕종도 이해 9월 숨진 사실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보다 90여 년 전인 949년(定宗4) 1월 후견인 왕식렴이 죽자, 서경 천도를 추진한 정종(定宗고려 제3대 국왕)도 3개월 뒤 사망한 사실을 연상케 한다. 덕종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그의 죽음은 보주성 문제를 둘러싼 강온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였다. 즉 타협론이 등장하기까지 엄청난 정치적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의 언급 외에 확인할 기록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온건론(타협론)이 정국을 주도함에 따라, 보주성 문제는 이후 80년의 긴 시간 동안 지루한 외교전을 통해 해결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964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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