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5) 역사 격량따라 급변한 '돈의 얼굴'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ㆍ들어볼래요 내 얼굴에 얽힌 사연

돈은 종이 혹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물건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 먹을 수 없고, 메모지나 급할 때 화장지로도 쓸 수 없는, 아니 감히 쓰지 못해 사용가치는 없는 물건이다. “돈이 뭐길래”라는 말에는 이렇게 구체적인 용도는 없으면서도,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거나 관계를 좌우하는 그 힘에 대한 탄식이 들어가 있다. “돈은 귀신에게 맷돌도 갈게 한다”에서부터 “돈이 말하면 진실이 침묵한다”는 힘을 지닌 돈. 그 돈의 디자인에 대해 밉네 곱네 이야기하다 보면 힘든 우리네 심정이 조금이라도 유쾌해지지 않을까? 한국의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계획을 세우면, 그것에 들어갈 상징이나 초상 등은 국민 여론을 통해 선정하고, 조폐공사에서 디자인한 후 심의와 자문을 통해 결정된다. 화폐에는 액면가를 표시하는 숫자와 기호, 중앙은행 이름, 인장이나 서명이 꼭 들어가야 하며, 숨은 그림(워터마크)이나 홀로그램 등 위조방지 기술도 적용된다. 거의 모든 그림은 0.03㎜의 세밀한 선이나 정교한 도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광복 후 78종의 화폐가 발행되었다.

 

동전, 열강 다툼의 공간


1910년 오얏꽃 문양


화폐는 주화(coins·동전)와 은행권(notes·지폐)으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주화는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린 상평통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최초의 근대 주화는 1888년 경성전환국에서 발행했는데, 주화에는 민족의 상징인 태극이 자리 잡고 있다. 이후 1892년부터는 왕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중앙에 위치하고 무궁화 가지가 액면가를 둘러싸고 있는 디자인으로 바뀌어 해방기까지 지속된다. 태극문양은 일제강점기에는 그 사용이 많이 줄어든다. 일제가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못 쓰게 하고, 왕실 문장인 오얏꽃 문양을 적극 확산시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 1893년에는 ‘개국 501년 대조선’이란 표기에서 ‘대’자를 당시 조선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못 쓰게 해 ‘조선’으로만 표기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사이 동전의 뒷면에는 일본식 쌍용이 들어가고, 1900년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문양이 독수리로 바뀌지만 이는 러일전쟁 중 오사카로 전량 보내져 유통되지 못한다. 이후 일본식의 봉황이 다시 새겨져 해방기까지 발행된다.


1915년 오동나무 문양과 수노인


이렇게 개항기 이 땅의 조그만 동전 위에서는 민족의 상징이 왕실의 상징으로 바뀌고, 그 다른 한 면에서는 일본과 러시아, 중국 등 열강의 자리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1950년부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모든 화폐에 들어갔다가 결국 사라지고, 거북선(1959년)과 무궁화(1959년), 다보탑(1966년), 이순신(1970년) 등의 이미지가 도입돼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1972년 오십원짜리 주화가 탄생하면서 자연물인 벼 이삭이 들어가고, 1982년 발행된 오백원짜리 주화에는 학이 새겨져 있다. 현재 한국의 화폐 중 이 두 동전만이 인물이나 역사적 의미의 상징물이 아닌 자연이 주는 편안함, 경쾌한 감성을 전하고 있다.


1948년 무궁화와 독립문


지폐, 대표 인물과 상징의 변주

그럼 주화가 이렇게 바뀌는 동안 은행권은 어떤 격랑의 물결을 타고 있었을까? 1902년에 일본 제일은행이 발행·유통시킨 지폐에는 당시 일본인 총재 얼굴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1915년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거의 모든 지폐에는 수명을 관장하는 수(壽) 노인상이 들어가는데 그 모델은 조선말기 외무대신이던 김윤식이라고 한다. 이 노인은 일본 정부의 오동나무 문양, 조선은행의 벚꽃 문양과 함께 1953년 사용 금지 때까지 38년 동안 조선인의 주머니를 쥐었다 폈다 하며 한반도를 돌고 돈다. 조선총독부의 모든 문서에 사용된 오동나무 문양은 일제강점기 내내 졸업장, 상장 등에 사용되었고 현재까지도 일본의 공식 정부 문양이다.


1950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해방 후 1950년 사이에는 이 오동나무 문양이 무궁화로 바뀌고(1946년), 나머지는 일본이 디자인한 것을 그대로 사용한 지폐가 발행된다. 1950년 6월12일 한국은행이 창립되었다. 화폐 발행 준비를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해 9월 일본에서 인쇄한 후 전량을 미군 비행기로 수송, 피란지 대구에서 발행을 해야 했다. 35년간 일본의 상징을 달고 다니는 모욕을 당하더니만 또 전쟁으로 고초를 겪으니, 역사가 잘못 되면 사람만 무시당하고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돈마저도 갖은 수난을 겪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인물은 바뀌어 지폐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들어간다. 왼쪽에 배치되어 있던 초상은 가운데로 옮겨졌고, 사람들이 접어 쓰면서 모욕을 준다는 이유로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진다. 국민들에 의해 동상이 내려지고, 강준만에 의해 한국의 소영웅주의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 인물에 걸맞은 디자인 이용법이다.


1953년 한국은행 휘장과 거북선(미군정청)


1960년 4·19 이후 현재 만원권에 새겨진 세종대왕이 천환권과 오백환권에 등장했다. 1962년 5월16일에는 통장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모자상의 천환권이 발행되는데,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력자의 부인과 아들 이미지라는 여론이 일면서 20일 만에 화폐 개혁안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오천원권에 이이(1972년), 오백원권에 이순신(1973년), 만원권에 세종대왕(1973년), 천원권에 이황(1975년), 오만원권에 신사임당(2009년) 등이 현재 은행권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여정 또한 순탄치만은 않다. 기술이 없어 영국에서 그려온 세종대왕과 이이의 초상은 코가 높고 눈썹이 우묵한 외국인상이 되기도 했고(1972년), 그동안 9번이나 바뀐 세종대왕 영정은 갈수록 젊어지고 얼굴이 바뀌어 “세종대왕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성형을 너무 많이 하신다”는 농담이 떠다니기도 한다.


1960년 세종대왕


하지만 화폐에 매번 인물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조선은행의 상징인 벚꽃 휘장이 1949년 추방되고, 미군정이 잠시 발행한 지폐(1953년)에는 태극과 무궁화의 결합인 한국은행 휘장, 위용 있는 거북선이 들어간다. 또 1962년 오백원권에는 구름이 이는 남대문과 화사한 장식 문양과 빛깔이, 1969년 오백원권에는 당당한 거북선 함대가, 오십원권에는 유려한 무궁화 화환으로 둘러싸인 봉화가 들어간다. 해방 후 현재까지 발행된 화폐 중 이들이 가장 무겁지 않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판 삽입, 다채로운 색상, 규격의 축소 등을 통해 세계적 트렌드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 발행된 오만원권은 작아진 사이즈, 밝은 색채, 알록달록한 무늬 등으로 지갑 속에서 그나마 밝은 느낌을 준다. 그동안 서체도 명조에서 고딕으로 바뀌는 등 몇 번의 변화를 보이고, 최근에는 월인천강지곡 서체가 인장에 사용되고 있다.

너무 고답적인 상징들과 인물상

한국 화폐에 들어가는 초상은 정부 표준 영정을 사용하고 있다. 이 표준 영정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상상해 그리는 상상화이므로 위인들의 실제 모습은 아니다. 화폐 속의 초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세종대왕의 김기창, 이순신의 장우성, 신사임당의 김은호 등 이들 세 명이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당연히 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지난 5월 국회에서도 거론되었다. 하지만 친일 행적과 작품의 가치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 등으로 관련 법령 교체는 무산되었다. 윤리관, 공동체의 정서적 반응은 상관없이 재능만을 최고로 여기는 재능 만능주의가 드러나는 정치권의 결정이다.


1962년 모자(母子)


또 하나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화폐 속에 인물이 꼭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다. 게다가 500~600년 전 인물들에게만 맞추다 보니,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모자, 그들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들까지 합해 조선조의 상징들만 70여년간 지속적으로 되풀이 사용되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이이가 쓰던 벼루, 오죽헌, 신사임당의 초충도, 혼천의, 계상거상도, 월매도, 풍죽도 등 보조 상징이 다시 불려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장식도 온통 전통 패턴으로만 디자인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가 막을 내린 지 10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근현대사를 대표할 현대 인물도 선정하지 못하고, 현대적 감성의 패턴 역시 개발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같은 조선시대라도 영·정조 시대의 수많은 콘텐츠도 있고, 보조 상징물이나 패턴 역시 근대기의 것들이 있음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1969년 남대문과 거북선


관습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에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고, 시대에 맞는 미적 쾌감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의 본연의 임무이다. 외국 화폐와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어린왕자와 생텍쥐페리의 비행노선도가 들어간 프랑스, 덴마크의 근사한 꽃 화폐, 자연물 등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스리랑카의 화폐는 그들의 국격을 오히려 달리 보게 만든다. 수집가가 아니더라도 그냥 예쁘고 새로워서, 그야말로 갖고 싶은 작품 수준이다. 2004년 화폐 단위변경(Redenomination) 논의가 있었고, 지난 10월 초에 또다시 거론되었다. 화폐를 둘러싼 이러한 경제적 대응도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우리 화폐가 경제물로서의 자리를 넘어 문화물로서 인정받고,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예술적·현대적 화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을까. 이를 위해선 이제 상징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와 그 사용방법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야말로 디자인적 본연의 자세가 필요하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30201003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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