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경기천년을 말하다] 2. 경기 천년의 역사 / 홍영의(국사학과) 교수

고려 경기제의 성립과 경기문화 홍영의 (국민대 교수)
개성서 한양으로 수도 옮겨
조선시대 경기영역 큰 변화
1910년 경기도로 공식적 쓰여

전근대 군주(君主) 중심의 왕조국가에서는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의 통치조직이 짜여졌다. 통치영역 또한 군주가 거주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왕경이 구성되었고 그것이 도읍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 왕조사회에서는 도읍을 통치영역의 중앙에 두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도읍이 있는 곳은 중앙이 되고, 그 나머지는 외방[京外] 즉 군현으로 구별되었다.

신분적 질서의식을 영역(공간)에 반영, 설정한 데서 출발한 중앙과 지방의 구분의식에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다”이라는 제민일치(齊民一致)를 추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차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경기는 이러한 중앙과 지방을 구분하는 이념에서 나온 것이며, 국왕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중앙의 범주였다. 삼국시기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면서 왕경(王京)과 경기(京畿) 그리고 군현으로 구분되는 통치원리의 형성과정은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는 신왕조의 물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1390년(공양왕 2) 경기 좌도 8개 현에 양광도 11현과 교주도 6현을 붙이고, 우도 5개현에 양광도 5현과 서해도 9현을 붙였다. 이와 함께 경기 좌우도에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파견하면서 경기는 중앙과 구분되어 점차 하나의 도(道)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전제개혁을 통해 과전법(科田法)을 마련하였다. 과전법은 과전을 경기에 한하여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그에 소요되는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기의 확대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기 영역에서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이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루어졌다.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개성의 북부지역이 서해도로 넘어가고 대신 한양의 남쪽지역이 대거 경기 지역에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의 한양 주변을 흔히 ‘경기도’라고 불러 왔다. 조선왕조가 전국을 8도(道)의 하나로 경기를 포함한 뒤, 경기 관찰사를 파견한 사실은 경기도로 인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 왔다. 더욱이 실록과 각종 문헌 가운데 ‘경기’와 함께 ‘경기좌우도’, ‘경기좌우도성’, ‘경기좌도’, ‘경기우도’, ‘경기도’ 등의 명칭이 발견되는 점도 그 같은 인식에 별다른 의심을 두지 않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자(심승구)에 따르면, ‘경기’는 조선의 공식 용어가 된 시기는 1414년(태종 14)에 경기좌우도를 고쳐 ‘경기’로 한 이후 조선의 8도체제와 함께 ‘경기’는 조선의 공식 용어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각종 법전류에는 ‘경기’로 명문화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경기는 1895년 23부(府)로 바꾸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13도제로 전환하면서 경기가 경기도로 정해진 것으로 보이며, 경기가 공식적으로 경기도로 쓴 것은 1910년 일제에 식민지가 된 뒤의 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기 천년’의 의미는 바로 이 때문이다. 

 

원문보기 :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08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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