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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양적완화는 구조조정 정책 아니다 / 조원희(경제학과) 교수

오늘날 양적완화라는 용어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와 함께 등장하여 경제와 금융시장 붕괴 방지책, 물가가 하락하여 경상가격 기준으로 경제가 쪼그라드는 무서운 현상인 이른바 디플레이션 위험에 대한 대책, 경기침체 극복책 등 뭔가 거시경제정책으로 유일무이한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나 할인율을 제로(0)로 만들어 시중에서 필요로 하는 자금을 충분히 공급하는 제로금리 정책은 단기금리를 손쉽게 제로로 만들고 전체 평균금리를 떨어뜨려 장기금리도 하락시키지만, 장기금리를 제로로 만들지는 못한다. 만기 3년 이상의 투자자금은 여전히 공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양적완화로 만기가 긴 국채나 회사채 등을 중앙은행이 대량으로 매입하게 되면 장기금리도 이윽고 제로로 수렴하고 시중에 통화가 팽창한다. 양적완화란 바로 이런 식으로 돈을 시중에 마구 푸는 것을 말한다. 국가가 발행한 공채를 중앙은행이 산다는 것은 사실 발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냥 돈을 찍어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양적완화란 경제학 교과서에 없는 정책으로 관절염에 고양이를 잡아먹는 민간요법만큼이나 사정이 워낙 급해서 사용하기는 하지만 아직 그 작용기전도 규명되지 않은 임시처방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효과란, 양적완화가 경제가 붕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신용쇼크를 방지하고 실물경제 활동의 추락을 방지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기침체 같은 ‘경제 질병’의 근원 처방이 되는지는 의문이며, 이미 그런 정책을 충분히 구사한 미국, 일본 등에서 보듯 디플레이션이나 경제의 장기침체에는 별 효과가 없다. 또 마치 아편중독 환자처럼 공짜 돈에 중독된 금융시장을 정상화시키는 일을 아주 어렵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나아가 돈이 공짜이니 죽어야 하는 기업을 마냥 연명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겨울에 풀이 죽어야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법인데 이들 좀비기업은 새로운 투자 기회를 봉쇄하는 역할도 한다. 이에 더해 위기 이후 미래 불확실은 여전하니 돈이 공짜라도 좀처럼 투자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은 장기침체이며 이것이 양적완화의 핵심 부작용이다. 그러니 국지적 위험이 아닌 절체절명의 국민경제적 긴급 상황이 아니면 사용해서는 안되는 ‘극약’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문제에 더해 양적완화란 어디까지나 미국, 일본, 유로화 지역 같은 기축통화 국가에서나 구사할 수 있는 정책이지 한국 같은 소국에서 국제 화폐도 아닌 원화로 양적완화를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그런 나라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세계경제 침체, 원유 가격의 하락 등으로 최근 조선·해운업의 부실이 심각하며 정부 주도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들 업종은 여전히 버릴 수 없는 한국의 주요 산업이며 시장이 아니라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통해 그 규모나 사업 분야를 조정하고 산업 고도화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부실 규모를 키운 국책은행이나 정책 담당자의 책임 등을 분명히 하고 구조조정 방식과 공적자금 규모 등을 정한 다음, 국회의 동의와 협조를 얻어 추진해야 한다. 양적완화라는 전혀 맞지 않는 접근법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구조조정에 정면으로 나서는 것이 정부의 임무이자 책임 있는 자세이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엉뚱하게 한국은행을 동원하여 국회를 우회하려는 태도는 자기 책임 회피를 위한 꼼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현 상황의 초점은 산업의 위중한 상황이지 구조조정 수단이 아니다. 또 현재의 세계경제 침체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으며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제2의 대규모 구조조정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에 대비해야 할 때이다.

다음번 위기의 진원지는 주택시장 붕괴 및 가계부채의 대규모 부실화로, 이것이 금융시장 위기로 직행할 가능성도 있다. 그때는 그야말로 극약 처방인 양적완화를 기업이 아니라 가계부채 탕감, 가계 재무구조조정에 써야 할지도 모른다.

빈곤층의 부채는 사실 국가의 복지가 잘되어 있다면, 대부분 발생하지도 않았을 부채이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탕감할 충분한 명분도 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62104025&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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