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명사 70인과의 동행] (26) 불꽃처럼 타올랐던 3월…그날의 절규가 가슴을 울린다 /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ㆍ장석흥 교수와 3·1운동 유적지를 걷다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 25번째인 ‘3·1운동 현장 답사’에 참가한 일행들이 지난 15일 경기 화성시 ‘제암리 학살’ 현장에 세워진 순국기념관 앞에서 장석흥 교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쥐면 부스러질 듯 청명한 가을 햇볕을 받으며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을 따라 3·1운동 유적지 답사를 떠나는 것은 생소했다. 3월이 되어야만 연례행사처럼 3·1운동을 떠올리는 타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면~’으로 시작하는 ‘유관순 노래’가 어릴 때부터 귀에 익어선지 10월 하늘 아래에서 3·1운동을 되새겨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

지난 15일 스물여섯 번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은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현장과 유관순 열사 기념관 및 생가,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생가, 천안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가볍게 즐기는 여행이 아니어선지 참가자 수는 평소 때보다 줄어든 28명이었지만, 학구열에 불타는 ‘소수 정예’는 출발 전부터 의욕이 충만했다. 새벽밥 먹고 출발한 여정이었음에도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 때까지 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버스가 안정적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자 이번 테마 여행을 이끌어 갈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는 장 교수는 평생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몰두해온 이 분야의 전문가다. 장 교수는 서두에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로마”라고 정의했다. 3·1운동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향점을 제공하고 독립운동 세력 조직화와 시민의식 고취 등 독립운동의 토양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족운동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 화성시 제암리의 3·1운동 순국기념관이었다. 제암리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가장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1919년 4월15일 만세운동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제암리에 진주한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고 출입문을 잠근 뒤 일제 사격을 가해 이들을 학살했다.

이날 교회 안에서만 23명이 학살당했다. 3·1운동 당시 전국에서 7500여명이 살해(일본 측 공식 발표)당한 것을 감안하면 제암리 희생자가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암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잔혹함과 야만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적 현장이다. 정규 군대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민간인을 교회에 가두고 총격·방화로 학살한 군사작전이라는 점에서 근대 이후 가장 잔혹한 반인도적 범죄라 할 수 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교회 터는 기념탑이 세워진 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기념탑 주변에 크고 작은 돌이 희생자를 위한 비석처럼 세워져 있다. 기념관 안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한 동영상을 관람하고 학살 관련 자료를 둘러보는 동안 참가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간간이 탄식만이 흘러나왔다.

제암리 희생자 23명 중 천도교인이 11명, 기독교인이 10명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서로 다른 종교단체가 함께 참여한 민족운동이었다. 세계사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쟁은 대부분 종교 갈등에서 비롯됐다. 종교가 다르면 민족도 국가도 여지없이 쪼개졌던 역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처럼 종교를 초월해 단결된 민족운동을 펼쳐나간 것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3·1운동의 대중화는 전국의 종교조직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종교적 이념보다 민족의 독립을 최상위 가치로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은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 훗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독립을 위해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의 연원도 3·1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 주체임을 알린 시발점


장석흥 교수가 충남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 열사 기념관 입구의 ‘초혼묘 봉안 기념비’ 앞에서 3·1운동의 여성 참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이화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던 17살 소녀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총칼 앞에 맨 몸으로 저항하다 체포된 뒤에도 옥중에서 줄기차게 만세운동을 벌이며 끝내 차가운 지하감방에서 순국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년 반이었다. 너무도 짧은 일생이었지만 불꽃처럼 강렬했던 그의 저항정신과 이름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사라질 수 없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산허리에 2003년 유관순 열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된 기념관이 있다.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 안에 그의 짧은 일대기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영상물이 있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그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은 없었다. 부모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일본 경찰의 칼에 사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났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관계자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고 알려졌지만 묘지는 끝내 망실되고 말았다. 지금 그의 무덤은 기념관 위쪽에 조성된 초혼묘가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유관순 열사 기념관 내부에 설치된 ‘벽관 공간’에서 한 참가자가 유관순 열사가 고문당하던 상황을 체험해보고 있다.

기념관에 전시된 관련 유물이 명성에 비해 너무 적고 빈약하다는 사실에 일행은 모두 놀랐다. 장 교수로부터 유관순 열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를 듣고난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해방 이후에 비로소 일반에게 존재가 알려진 인물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잔다르크’ 같은 인물을 찾아보라는 지시에 따라 발굴한 것입니다. 당시 유명 독립운동가들은 엄밀히 말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라이벌이었지만 유관순 열사는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그의 일생이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한국은 ‘유관순’이라는 찬란한 독립운동 역사를 가질 수 있었지만 3·1운동 당시 수많은 유관순이 있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기념관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소박한 초가집으로 조성된 유관순 열사 생가로 자리를 옮겨 여성의 3·1운동 참여에 대한 강의를 이어갔다.

3·1운동 당시 여성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신이었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여성단체가 탄생해 전국으로 확대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역할은 급속히 확산됐다. 3·1운동을 통해 여성은 가정에만 머무는 피동적 존재가 아닌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했다. 3·1운동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민주주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영국에서도 1927년에야 여성의 보통선거권이 보장됐지만, 한국은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헌법에서 이미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지금 3·1운동인가

일행은 천안시 목천면 연리의 이동녕 선생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생이 태어나 16세까지 살았던 생가 옆에 조성된 기념관에는 선생의 흉상과 휘호, 대형 태극기와 함께 삶과 사상을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독립기념관 연구소장인 장 교수는 “독립기념관과 지척인 탓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이동녕 선생은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훗날 광복군 창설에 진력하며 무장 독립투쟁에도 기여했지만 민족의식 교육과 계몽을 통해 힘을 기르는 장기적 차원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기념관 앞 대형 화강암에 그의 친필 ‘산유천석(山溜穿石·산에서 흐르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이라는 글귀가 그의 일생을 나타낸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맏형이자 수호자였다. 3·1운동 직후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을 했으며 국무총리를 지냈다. 염원하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중국에서 눈을 감은 이동녕 선생이 지금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고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주장이 횡행하는 현실을 본다면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답사 일정이었지만 장 교수는 3·1운동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천안 독립기념관 내 강의실로 자리를 옮겨 마이크를 잡았다. 장 교수는 “3·1운동은 독립을 1차 목표로 했지만 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것처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평화운동이자 인도주의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3·1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넘어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자유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라며 “독립운동을 항일 무력투쟁사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 교수는 “갑오농민혁명-3·1운동-독립운동-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인본주의 의식혁명의 계보가 통일과 세계 평화로 이어지도록 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말로 숙연했던 이날 답사 여행을 마무리했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610212215005&code=9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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