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기고] 신라 영웅과 전사의 무덤 / 김재홍(한국역사학과) 교수

신라 천 년. 동아시아 왕조가 대략 200년의 수명을 가졌던 점을 고려할 때, 한 나라의 역사가 천 년을 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러한 역사를 우리가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지난 세기 동안 역사학계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 개별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실이 최근 경상북도에서 신라사대계로 간행되었다. 그 제목도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이다.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은 신라 문화를 보여주는 ‘자료집’과 학문적인 연구 수준을 보여주는 ‘논고’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융합의 시대에 문헌사학과 고고학(미술사)의 접점을 시도하는 현시점에서 접목으로 나아가는 시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이 책을 접하면서 신라 천년을 떠올릴 것이다.

신라사대계를 받아 보고 신라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신라와 신라인의 원형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형적인 신라인을 꼽자면 김유신, 태종무열왕, 원효 등 삼국통일의 주역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신라인의 원형으로 석우로를 추천하고 싶다. 그는 나해이사금의 태자이자 흘해이사금의 아버지로서 왕족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왕족과는 달리 포상팔국의 난, 감문국`사량벌국 토벌, 왜인 격퇴 등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영웅이었다. 강인한 영웅의 풍모와 함께 참전한 부하들에게 직접 불을 피워주며 위로하는 따스함이 있었다. 또한 적대국인 왜국 사신이 왔을 때에는 “왜국의 왕을 염전의 노예로, 왕비를 부엌데기로 만들겠다”라는 농도 부릴 줄 아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 일로 인하여 왜국의 침입을 받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책임감이 강한 인성도 있었다. 대략 3, 4세기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우로는 이사금 시기의 영웅으로서 강렬함, 따스함, 자유분방함, 책임감을 가진 우리의 신라인이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신라의 영웅 석우로를 통해 신라인의 원형을 맞이할 수 있다.

신라사대계의 자료집을 넘기면 석우로가 살았던 시기에 조영된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다. 3세기 후반에 사로국의 왕족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기차 모양으로 기다란 덧널을 설치한 신라만의 독특한 덧널무덤(목곽묘)을 만들었다. 신라식 목곽묘에는 전쟁과 관련 있는 쇠갑옷, 쇠칼, 쇠창 등 무기가 집중적으로 부장되었다. 판갑옷으로 중무장한 전사의 무덤인 것이다. 조금 상상을 보태자면 왕족이면서도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석우로도 전사의 무덤에 묻힌 한 명의 신라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영웅시대를 살아간 신라인의 원형이고 석우로와 같은 유형의 인물이 신라의 발전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라인을 하나로 묶었던 요소는 오리 모양 토기와 돔배기(상어고기)였다. 신라인들은 오리 모양 토기를 제기로 사용하여 신라인의 동질성을 확인하였다. 제수로 올려진 돔배기는 신라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경북 내륙으로 전파되었고 지금도 우리의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신라인은 고려시대 유학적 사고에서 집필된 삼국사기의 관점에서 연유한다. 고대 신라인들 중에서 충과 효로 이루어진 착한 인간상만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무덤 속에는 당대 신라에서 자라고 성장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감출 수 없었던 강렬하고 따스한 영웅의 모습을 석우로와 영웅시대의 전사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사대계를 넘기면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원문보기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6321&yy=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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