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온의 소리] 교회 사투리 / 이의용(교양대학) 교수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 북한 사람들과 금강산에서 며칠간 회의를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우리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말 때문에 불편했다. 그 하나가 “일 없습니다”였다. 회의 중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니, 그쪽 대표가 “일 없습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걸 본 우리 대표가 웃으며 ‘일 없다’는 말이 ‘괜찮다’란 뜻이라고 통역(?)을 해줘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진시황은 10년 전쟁 끝에 39세에 천하통일을 이뤘다.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그는 ‘제국’을 이루기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마차 궤도에 맞춘 도로와 운하, 만리장성의 건설 등을 추진했다. 그래서 정치·경제적으로 ‘하나의 중국’ 건설에 착수했다. 

동시에 언어 통일도 시작했다. 영토는 점령했지만 지역마다 그들만의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진정한 통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자를 공식 문자로 정하고, 다양한 언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표준화했다. 그 과정은 만리장성 축조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언어는 거대한 중국의 구심력이 되었다. 

중국, 일본이 우리를 수없이 침략하고 지배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건 우리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이라는 구심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된 언어 체계는 공동체의 필수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표준어, 맞춤법 등 어문규정을 만들어 모든 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의 언어 체계가 달라지니 “일 없습니다” 같은 불통 현상이 일어난다. 교회도 그 사회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다. 교회는 교회를 둘러싼 사회와 소통을 잘해야 한다. 교회가 끼리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사투리를 고집하는 건 소통의 장벽을 쌓는 일이고 선교의 문(門)을 스스로 닫는 일이다.

신학적인 전문용어는 뜻을 풀어주면 되지만, 정상적인 국어 교육을 받은 합리적인 비신자가 납득하기 어려운 ‘교회 사투리’는 당장 고쳐야 한다. ‘사모님’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스승이나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목사 부인을 교인들이 ‘사모님’이라 부르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목사가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모’라고 하는 건 뭔가. 스승의 부인과 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목사의 아내가 자신을 ‘사모’라고 일컫기도 한다. 심지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모’라 하고, 아예 목사 부인들이 ‘○○○사모회’라는 모임을 만든다. ‘사모’라는 직분은 성경에도, 교단총회 헌법에도 없다. 차제에 목사 부인에게도 집사나 권사 같은 합당한 직분을 부여해서, 목사의 아내라는 애매한 역할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면 좋겠다.

아주 오래전, 내가 출석하던 교회에 새 신자가 나왔다. 담임목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집사로 세웠다. 교회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어느 날 제직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가 회의 도중 어느 여성 집사를 보고 “아주머니”라고 호칭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평소 동네에서 그렇게 부르던 사이여서 그렇게 불렀을 뿐인데. 교회에 처음 나온 신자 입장에서는 교회 용어가 매우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용어가 자기가 배운 어문규정에서 벗어난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목사’면 ‘목사’지 ‘부목사’는 뭔가. 자신을 칭할 때 ‘목사 김’이라 해야지, 왜 ‘김○○ 목사’라 하나? ‘서리집사’는 ‘집사서리’가 아닌가. ‘우리에게 향하신’은 ‘우리를 향하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형제는 형과 동생을, 자매는 언니와 동생을 가리키는 말인데 왜 ‘○○형제(자매)라고 할까.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인데 왜 ‘축복을 달라’고 하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할까.

하나님의 성함을 낮춰서 ‘이름’이라 하고 ‘돌아가셨다’를 ‘죽었다’고 할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저희’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할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공중 기도에서 왜 하나님을 함부로 ‘당신’이라 하고, 사람에게 ‘님’자를 남발할까. 무례하게.  

어제가 한글날이다. 교회에서 우리끼리만 쓰는 교회 사투리가 우리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지 자성해보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말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그걸 찾아 써야 소통이 잘된다. 목회자들부터 성경책과 국어사전을 나란히 펴놓고 세상과 통하는 바른 말을 찾아 썼으면 한다. 통역이 필요 없게! 

원문보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27470&code=23111413&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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