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청사초롱-이창현] 위험사회와 정치의 부재 / 이창현(언론정보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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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것에 위험사회의 본질이 담겨 있기도 하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화의 과정에서 발달한 과학기술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의해 파생되는 위험도 감수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세먼지와 미세플라스틱에는 위험사회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세먼지는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석탄이나 석유를 태울 때 나온다. 19세기 산업혁명 과정에서 증기기관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사회의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다. 기술혁명은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 런던 스모그라는 역사적 재앙을 가져왔고, 현재 미세먼지 문제로도 이어진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미세먼지의 위험성이 커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연환경의 위험은 인간의 삶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공기청정기를 이용한다고 해도 미세먼지의 위험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세플라스틱은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 알갱이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삶까지 위협한다. 플라스틱은 싼 가격에 활용성이 높아 널리 쓰이지만 이것의 남용이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위험으로 다가온다. 1930년대 플라스틱이 처음 발명된 후 100년도 되지 않아 플라스틱이 다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다. 인간은 플라스틱의 유해성을 알면서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남용하고 있다. 버려진 플라스틱쓰레기는 썩지 않고 떠내려가 태평양에 거대한 플라스틱 섬을 만들었다. 이들이 바닷물에 떠다니면서 바다생물의 몸으로 침투했고 이것을 섭취하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버렸던 일회용 플라스틱 용품이 다시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식탁에 오르는 상황이 됐다. 미세먼지와 미세플라스틱처럼 신자유주의 위험성도 우리의 생활 깊숙이 번져 있다. 나는 최근 KT 통신구 화재와 KTX 탈선을 보면서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체감한다. 통신 및 철도와 같은 기간산업의 공공성을 해체시켜온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미세한 곳에서 위험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해 왔고, 이것이 가시적인 위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통신구 화재를 통해 우리는 초연결 사회가 하루아침에 초단절 사회로 변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동안 통신의 공공성은 외면받았고, 사람들의 공공 커뮤니케이션 권리는 사라져 버렸다. 통신구 화재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구리선을 하나하나 연결하는 노동인력이 모두 다 자회사 직원임을 보면서 안전관리의 사각지대가 많음을 감지한다. 이번 KTX 사고에서도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절감한다. 코레일의 운영방식이 수익성만을 추구하며 안전과 유지보수 부문을 외주화했던 것이 위험을 증대시켰다. KTX 사고 열차에 안전업무 담당은 1명뿐이었고 나머지 2명은 승객 서비스 업무를 맡고 있었다. 경비 절감을 위해 인위적으로 회사와 직역을 분할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고 당시 코레일 담당 직원이 아니라 군인이 구조를 도왔다고 한다. 그 피해는 모두 국민 몫이다. 이것처럼 신자유주의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의 안전을 미세하게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통신구 화재 사고에도, KTX 탈선 사고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미세 위험사회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위험을 극복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려는 개혁도 보이지 않는다. 미세먼지와 미세플라스틱의 위험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듯 KT와 코레일의 안전사고 문제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울리히 벡의 이야기처럼 이제 우리 사회도 성찰적 근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며 현재의 상황은 해방적 파국처럼 보인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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