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교육·정치·언론 다방면 명성…나라 곳곳에 발전 토대 쌓아 / 성곡 김성곤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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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정치, 경제, 언론, 교육, 체육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ㆍ1913~1975)은 으뜸으로 손꼽힐만하다. 자신의 노력으로 쌍용그룹을 창업해 재벌의 반열에 들었고, 해방직후 대구에서 영남일보 창간에 힘을 보탠 데 이어 연합통신의 전신인 동양통신을 설립하고 국제언론인협회에 가입해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이 됐다. ◆ 다방면에 업적 남겨
영남대학 설립을 도왔고 국민학원(국민대학)을 인수, 경영함으로써 육영사업가로서도 큰 위업을 떨쳤으며 학창시절 유도선수였던 그는 대한유도회 회장으로 ‘성곡컵 국제유도대회’를 개최하는 등 체육인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제4, 6, 7, 8대 등 4선 의원으로 박정희 시대에는 한때 ‘권력서열 2위, 차기 대권후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했으나 결국 박 대통령의 견제로 권력의 길은 좌절 되고 말았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많이 지워지긴 했으나 그가 기초를 놓았던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그가 쏟았던 노력의 결실은 아직도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성곡은 1913년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하동에서 아버지 김광도씨와 어머니 김보옥 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10세에 현풍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함에 따라 달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이 때문에 다시 서울의 보성고보에 들어가 졸업하게 되었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에 진학, 25세에 졸업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바로 공직을 사임하고 대구상공은행에 입행했지만 은행원으로 만족지 못하고 이듬해 사직한 후 칠성동에 있던 일본인 비누공장을 동업자들과 함께 인수해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했다. 중등학교시절에 항일운동을 했고 학업을 마친 후 기업을 창업한 그의 젊은 시절은 이미 역동적 일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삼공유지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는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지부장 서상일)의 재정부장을 맡아 국가건설의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수립 전 해방공간에서 그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대구10ㆍ1사건은 그의 정치 인생에 여러 가지 뒷말을 남겼다. 그가 사업가로서 본격적인 무대에 나선 것은 정부수립을 전후해서다. 특히 금성방직은 쌍용그룹의 모체가 된 기업으로 이 회사는 일제가 두고 간 적산 물품 가운데 방적기를 눈여겨본 성곡의 사업가로서의 안목과 대구 비누공장판매대금을 투자해서 만든 것이다. 해방직후 물자 부족에 허덕였던 우리 사회에 이 회사는 인조견사를 생산 공급함으로써 국가 경제에 도움을 주면서 호황을 누려 회사설립 2년 만에 자본금이 2.5배로 늘어났다. 금성방직은 당초 경기도 안양 소재 적산 기업인 조선직물공장 건물 일부를 임차받아 영등포역과 안양역전에 방치된 일본 동경방직 소유의 방적기 2천 추를 정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아 설치해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방적기는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동경방직이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제품을 한국으로 옮겨놓았다.
성곡은 금성방직의 성공으로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52년 야당 정치인이었던 정일형이 경영하던 대한통신을 인수해 상호를 바꾸어 동양통신을 설립했다. 1954년에는 금성산업(주)쌍용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삼흥방직을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상호를 바꾸고 UNKRA 원조자금을 끌어들여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1962년에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쌍용양회공업을 설립, 정부의 17개 기간산업개발에 본격 참여했다. 시멘트공장의 가동과 함께 연관 사업으로 포장지에 필요한 크라프트지 생산공장인 삼화제지를 설립하는 한편 쌍용양회 북평(동해)공장 확장에 소요되는 건설기자재 및 시멘트 수송을 위해 금성해운을 설립했다. 그러나 쌍용양회가 주력 기업이었고 그룹의 사활이 걸린 사업인 만큼 확장에 따른 엄청난 자금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당시 호황을 누리던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대농그룹에 매각했다. 이같은 과정을 그쳐 쌍용양회시설을 완공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면서 71년에 쌍용그룹은 재계 서열 5위의 재벌로 부상했다. 성곡 작고 직후 쌍용그룹은 쌍용양회, (주)쌍용, 한국ㆍ이란석유(S오일), 쌍용해운, 고려화재, 쌍용제지, 쌍용중기, 쌍용전기, 쌍용종합건설, (주)승리기계, 쌍용제사, 승리전자, 동양통신, 대구문화방송, 쌍용엔지니어링, 쌍용해운,유국개발, 쌍용스카트제지, 국민대학, 현풍중고, 성곡언론재단, 성곡학술재단 등을 이끄는 복합기업집단으로 실체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성곡은 정상급의 재벌로서 엄청난 기업군을 거느리는 한편에선 언론인으로서, 육영사업가로서, 학술재단을 경영하는 문화계와 학계의 후원자로, 체육인으로서 역시 최고의 화려한 업적을 꽃피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뚝한 역량을 보인 것은 젊은 시절부터의 정치 활동이었다. 기업 활동이 정치 활동의 뒷받침이 되기도 했고, 역으로 정치 활동이 기업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했겠지만, 이는 결국 정경유착의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10ㆍ1사건에서 좌절을 맛본 그는 1958년 고향인 달성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된 것이 정계의 첫발이었다. 그러나 1960년 4ㆍ19혁명으로 인해 구정치인으로 낙인찍힌 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5ㆍ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대구ㆍ경북의 인맥이 그를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시키면서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한다. 대중적으로는 당시 그의 이름자 이니셜을 따서 SK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특히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압박해 3선개헌을 성사시켰다. 4인 중 그는 특히 학창시절 박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씨와 절친했고 나이로는 네 살 위였기 때문에 소년기부터 친숙한 관계로 사적으로는 호형호제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그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을 상대로 해외차관과 정부 발주공사금의 10%를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자신에게 바치게 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의 묵인하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는 박정희의 최측근이 되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1971년 자신을 비롯한 4인방이 박 대통령의 의중을 무시하고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가결한 10ㆍ2 항명 파동을 일으킴으로써 정치생명이 끝나고 만다. 박정희의 분노를 산 그는 길재호를 비롯해 여러 명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난다. 당시 그는 트래드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시중에는 너무 많이 맞아 생으로 변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정계은퇴 이후인 1973년에는 제8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대한양회를 인수하고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그의 정치 인생과 함께 따라다니는 구설은 남로당과 관련한 ‘신분세탁’과 관련된 문제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승부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었고 그의 유해는 두 차례의 이장 후 달성군 구지면에 안장됐다. 출처: http://www.idaegu.com/?c=11&uid=4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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