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투병중 오페라무대 선 국민대 김향란 교수
1998/11/18, 조선일보

[김향란교수] 암투병 5년만에 오페라 무대 다시 섰다.
"매일 4시간씩 합동훈련 강행...공연중 대사 잊어먹을까 걱정".
{오늘 공연을 본 모든 분들이 희망을 나눠가졌으면 합니다.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으로 겁없이 노래했던 5년전과는 달리 암과의 싸움에서 겸손해진 저를 보셨을테니까요.}

17일 오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베르디의 [오델로]에서 [데스데모나]역을 맡아 열연한 김향란(39·국민대) 교수를 30여명의 제자들이 둘러쌌다. 서울시향 바이올리니스트인 남편 김동주(44)씨가 {수고했다}며 어깨를 감싸안았다. 아들 재민(9)이도 엄마 볼에 입을 맞췄다. 5년만의 오페라 재기무대. 그러나 1천여명의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외에 그녀에 대한 [특별 대우]는 없었다. 김교수의 공연은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94년 8월이었다. 8시간에 걸친 대수술. 유방암 3기였다. 왼쪽 가슴을 들어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는 말을 들은 한달 뒤. 의사는 이번엔 난소쪽에 주먹만한 종양이 잡힌다고 했다. {한쪽 가슴이 없어진데다 아기까지 가질 수 없는 여자가 된 거죠.} 투병생활은 노래를 처음 할 때만큼 어려웠다. 한번에 12시간 걸리는 항암주사를 맞았다.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빠졌다. 잠을 설치고 몸무게는 한달새 6㎏이 빠졌다. 투병생활을 잘 버텨낼 수 있을 지 자신감도 잃어갔다.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의사 말에도 몸은 여전히 불편했다. 항암제를 계속 투약해야 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몸은 파김치가 됐다.

강단에 설 수 없었던 그녀는 학생들을 동부이촌동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누워있는 김 교수 옆에서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목이 부어 쉰 목소리로 김 교수는 학생들의 발성과 음정을 교정했다. 95년 이후에야 개인연주회나 찬조출연자로 연주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페라 재기는 꿈도 못꾸었다. 독창회와는 달리 수십명이 매일 합동연습을 해야 하는 대작업이었다. 완치 판정을 받지 못한 채 요즘도 6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받고 있는 김 교수는 호흡을 맞춰야 하는 동료들에게 폐가 될까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가진 능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라는 뜻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달 초 국립오페라측 제의를 받아 매일 4시간씩 맹연습에 들어갔다. 국립 오페라단 박수길(박수길)단장은 {암투병속에서도 어려운 연습을 이겨낸 김 교수가 앞으로 재기한 모습을 더욱 많은 무대에서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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