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나의 길 나의 신앙 ⑸―조현석(공과대학 동문)] 대학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밤낮공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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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23(화) - 국민일보 - 군 생활을 마무리지을 즈음 마지막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1982년 1월이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동생이 면도칼로 천장을 찢더니 무엇인가를 집어넣었다. “그게 뭐야?” “대학 합격증” “그걸 왜 거기 집어넣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들 낳으면 보여주려고.아빠가 실력이 없어서 대학에 못간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간 것이라는 증표로 보관해야지”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었다.내가 돈이 없어 대학에 못가는 것보다 동생이 못가게 된 것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동생을 타일렀다.3월에 제대하고 나면 동네 사람들 집에 다니면서 일해 그 품삯으로 대학 보내줄 테니 한 해만 더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다. 제대하자마자 새벽과 밤엔 우리 집 일을,낮에는 동네 사람들 집에서 일을 해주면서 품삯을 모으기 시작했다.슬프고 아프던 시기였다.논에 모를 심으러 가서 주인집 아들은 어느 전문대학에 다니는데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주님,나도 공부하고 싶어요”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남북이산가족이 만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그 해 봄 여름 가을은 텔레비전마다 온통 이산가족의 슬픔과 기쁨의 울음으로 가득 찼다.그 무렵 월남하신 6촌형을 만났다.6촌형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 이북 5도민연합회에서 대학 등록금을 해결해 준다고 알려주었다.그 말을 듣고 난 후 2개월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 몇몇 사람들이 ‘참 잘 살기 때문에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이북5도민연합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지는 못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와 내 동생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대학 및 대학원 6년동안 학비 전액 면제와 매월 20만원씩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동생은 집에서 가까운 청주대에,나는 국민대에 입학하게 되었다.만약 20만원씩 학비보조금을 지불해 주지 않았다면 대학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동생을 고향에 두고 홀로 대학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이런 파격적인 장학금 제도는 전년도인 82년엔 없었다. 국민대는 다음해인 84년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를 없앴다.내가 입학한 83년도에 장학금을 너무 많이 지불해 학교 재정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당시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 한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대학에 들어간 뒤 일할 때 습관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했다.일터에 있을 내가 대학에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감격,그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동료 학생들은 이성을 소개받고 축제에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신 기회인데…. 대학기간 내내 축제때 이성을 소개받는 자리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일이 최고의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내게 대학 4년은 지금까지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한 기간이었다.4년동안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났다. 정리=전재우기자 jwjeon@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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