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소나무를 찾아서>(3)충남 서해안 솔숲-솔숲은 농경문화의 동반자 /전영우(산림)교수

2003. 3. 21. - 문화일보 -


막대 알사탕 5개, 소주 1병. 당산소나무 앞에 놓인 제물은 조촐 했다. 의외의 애틋한 광경에 서러웠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런 대접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소나무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삼현 육각의 흥겨운 굿거리 장단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정성 들여 마련한 제상 가득 채워진 갖가지 음식들은 영험한 당산소나무를 위한 당연한 대접이었다. 풍어(豊漁)와 안전한 바닷길을 300년 이상 이 나무에게 기원하던 마을의 풍어제는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었다. 간척사업으로 바닷 길이 막히면서 당산소나무 곁에는 지난 수백 년의 영화를 설명하는 표석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 땅에 솔밭의 형성과정을 보여줄 풍광을 찾고자 충남 서해안을 찾은 우리는 몇 번씩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하늘로 웅비하는 듯 모든 가지들을 활짝 치켜든 거대한 소나무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그 멋진 모습은 바쁜 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궁리에 있는 당산소나무 앞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산소 나무 주변은 바닷길이 끊긴 것만큼이나 많이도 변했고, 우리들이 찾고자 하는 풍광은 없었다. 마을과 들판을 감싸 앉고 있던 솔 숲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경작지와 과수원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문화를 나무와 관련지어 흔히 ‘소나무 문화’라 일컫는다.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서 소나무와 살다가 뒷산 솔밭에 묻힌다 ’는 이야기는 소나무에 의존했던 농경문화의 특징을 함축하는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솔가지를 금줄에 끼워 잡인의 출입을 막으면서 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로 만든 가구와 농기구를 사용하다가, 생을 마감하면 뒷산 솔밭에 묻혔다. 소나무에 의존한 우리네 농경시대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오늘날도 회자되고 있는 셈이다.

소나무는 흔한 나무다. 흔한 만큼 이 땅에 뿌리박은 역사도 장구 하다. 그런 소나무에 대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나무는 침엽수 중에 가장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왔던 나무다. 소나무류는 이 땅에 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출현했다. 구석기문화를 싹틔운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약 100만년 전임을 감안하면 소나무류는 장구한 세월동안 이 땅을 지킨 터줏대감인 셈이다. 소나무류 외에 지난 수천만 년 동안 노간주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이깔나무 주목 등이 한반도의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침엽수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는 1만년 전에 있었던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를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다. 또한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환경조건과 산이 많은 지형조건 때문에 생물다 양성이 높았다. 오늘날도 1000여 종류의 나무들이 자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몇 천년 전의 이 땅은 온대활엽수 극상림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엽수림은 한반도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변해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조상들 역시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숲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수렵채취의 떠돌이 생활을 버리고 한곳에 무리 지어 정착하고, 농사를 짓기 위 해서는 농경지를 비옥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수단으로써 가축이 나 사람의 배설물, 온돌 아궁이의 재, 농가 주변의 산에서 활엽수의 잎이나 풀을 썩혀서 만든 퇴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이나 나무와 풀을 태워서 만든 재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아 농경지에 비료로 사용하기에는 불충분했다 .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을 주변 산에 자라는 활엽수의 잎이나 가지를 더욱 많이 채취하여 퇴비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숲 바닥의 낙엽이나 유기물도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연료로 온돌 난방 에 사용됐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숲을 괴롭힌 이와 같은 방법은 활엽수가 자라던 땅 힘을 차츰 악화시켰다. 이렇게 나빠진 토양은 활엽수가 자랄 수 없는 헐벗은 땅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나쁜 토양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들만이 활엽수들이 자라던 헐벗은 곳을 점차 차지하게 됐다.

다시 말해 농사에 필수적인 땅 힘을 지키고, 온돌 난방으로 추운 겨울을 넘긴 조상들의 농경문화가 농가 주변의 숲 모습을 낙엽 활엽수림으로부터 점차 소나무 숲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노릇을 한 셈이다.

소나무가 농경문화의 산물이라는 흔적을 오늘날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을 주변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무성한 소나무 숲이, 사 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골로 갈수록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사는 동네 주변에 자라는 소나무 숲이 사실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된 인간의 손길 때문에 지탱되어 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산림학자들은 마을 주변의 우리 소나무 숲을 인위적 극상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 솔숲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 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지만,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서 소나무 속에서 살다가 뒷산 솔밭에 묻힌 옛 풍경을 찾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압축고도성장의 거친 파도가 지난 30여 년 동안 이 땅을 망가뜨렸을 망정 우리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전형적인 고향 풍경은 아직도 건재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평화로웠다. 솔밭 사이에 자리 잡은 몇몇 무덤은 유택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판은 기름져 보였다. 차들의 왕래가 끊임없이 분주한 지방도 옆 좁은 터에 자리를 편 이호신 화백은 자동차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밭이 안고 있는 그 평화로운 풍광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뒷산 솔숲을 거닐면서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쓰면서 송편, 송화다식, 송기떡을 먹고 살다가 이승을 하직할 때는 송판으로 만든 관에 묻혀서 뒷산 솔밭에 묻혔던 농사꾼 조상들의 삶을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일각을 다투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당산소나무를 향한 그 애틋한 정성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는 까닭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았다.

글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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