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소나무를 찾아서>(10)270년前 ‘화폭속 자태’ 그대로 간직 / 전영우(산림자원)교수

2003년 5월 9일(금) - 문화일보 -


포항의 노거수회(老巨樹會)가 개최한 창립기념 심포지엄에 초청 돼 주제발표를 한 인연의 끈이 그 시초다. 심포지엄과 함께 개최 된 사진전, ‘향토의 대자연전’의 사진들 중에 겸재의 그림과 함께, 그림 속의 소나무와 빼닮은 실제의 소나무가 전시되었다.
이 소나무는 문화의 창으로 나무나 숲을 봐왔던 한 산림학도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빠듯한 일정은 상경길을 재촉했고, 실제 소나무를 확인할 기회를 갖기에는 6년 세월이 더 필요했다. ^ 겸재 소나무는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란 부채 그림 에서 유래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의 중앙에는 오른편으로 기울어진 한 그루의 노송이 청청한 기운을 내뿜고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선비가 이 소나무에 의지하 면서 오른편 뒤쪽의 폭포를 관망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삼용 추폭하 유연견남산(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이라는 화제(畵題) 가 적혀 있다. 겸재 그림 속의 소나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근원은 이 그림의 화제에서 출발한다. 화제의 ‘삼용추폭’은 내연산 용추 계곡의 3폭포를 뜻한다. 내연산은 영덕과 포항 사이에 있는 태백 산맥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12폭포의 비경을 간직한 계곡과 고 찰 보경사를 품고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삼용추폭은 여섯 번째 쌍폭(雙瀑)인 관음폭과 일곱 번째 폭포인 연산폭을 일컫는 옛 이름 이다. 특히 관음폭과 연산폭을 끼고 있는 용추계곡은 주변에 자 리잡은 선일대, 비하대, 학소대 등의 기암절벽과 어울려 이십 리 가 넘는 내연산 계곡에서 가장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이삼우 원장이 ‘고사의송관란도’의 소나무를 연산폭포 위의 비 하대(飛下臺)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노송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겸재의 청하 현감 재임 사실, 둘째 내연산 연산폭을 다녀간 흔적, 셋째 그 당시 풍경을 담은 그림에 나타난 사실성 등을 그 런 근거로 들었다.

우선 겸재는 영조9년(1733) 봄에 58세의 나이로 청하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2년 남짓 재임했다. 청하로 내려온 겸재가 이웃의 명 승, 내연산 삼용추를 찾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흔적은 연 산폭포 아래 우묵한 바위벽에 새겨진 ‘갑인 추 정선(甲寅 秋 鄭敾)’이라는 탐승기념 각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갑인년(1734) 가을에 연산폭포의 바위벽에 남긴 이런 흔적과 함 께 청하 고을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 龍湫圖)’ 3폭과 ‘청하읍성도’ 등의 그림이 ‘고사의송관란도 ’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들 그림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된 ‘내연삼용추도’는 관음폭과 연산폭을 중심으로 부근의 기암 절벽을 힘찬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는 겸재의 이 그림을 ‘묵직한 적묵법과 격렬한 흑백 대비, 대담한 형태 변화, 과장과 생략 등을 구사’ 한 그림으로, 겸재 생애 최고의 역작인 ‘금강전도’와 함께 진 경산수화풍을 확립한 그림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했던 때가 청하 현감 재임 시기라는 미술사학자의 피력이 없더라도 용추계곡을 다녀온 이는 누구나 ‘내연삼용추도’가 선일대에서 바라본 풍광과 다르지 않음을 금 방 느낄 수 있다. 겸재 그림의 이런 사실성 때문에 이 원장은 ‘ 고사의송관란도’에 나타난 소나무를 비하대 위의 노송에 초점을 맞춰 그렸다고 믿고 있다. 이 원장은 “그림에 나타난 폭포는 연산폭의 윗부분을 묘사했고, 지금도 연산폭이 지척인 그 자리에 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모습의 수백 년 묵은 노송이 살아 있으며, 그 생김새며 규격 등을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 서 있던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는 듯했다.

내연산 골짜기에는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절벽 끝에 매달린 낙 락장송과 붉은 진달래, 맑은 폭포수가 연출하는 경관은 선경이 따로 없는 듯했다. 관음폭포 아래에서 저 멀리 절벽 위에 걸린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겸재의 소나무다. 저 소나무가 겸 재가 그림의 소재로 쓴 나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땀을 훔칠 틈도 없이 바로 폭포 옆으로 난 경사진 길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비하대의 암장 밑에 자라는 겸재 소나무는 굳건했다. 40여m의 거 대한 절벽 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모습이 대견하다. 8∼9m의 키에 밑둘레가 2m를 넘는다. 동편 낭떠러지 쪽으로 드리워 서 있 는 모습이 그림 속의 소나무와 비슷하다.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좋지 않은 생육조건을 감안하면 족히 400∼500년은 묵었을 것 같다. 이 원장께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생장추(生長錐: 나무의 속 고갱이에 구멍을 뚫어 나이테만 뽑아내는 기구)로 나무의 실 제 나이를 한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생육조건이 비슷한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떨어진 가지로 나이테를 세었는데 일반 소나무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묵은 소나무였지. 이런 생육조건??감안하면, 아마 이만한 크기면 500년도 더 되었을 걸.” “그 래도 나이 먹은 근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면 더 좋을 텐데요.” “무얼 그런 짓을. 그냥 믿으면 되지.”

겸재 소나무가 자라는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반 평도 되지 않는 바위벼랑 위에는 진달래가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진달래 더미 속에서 겨우 자리를 만든 이 화백은 시답지 않은 나의 문 제제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겸재의 소나무를 열심히 화폭에 담고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간절히 소나무의 장수를 빌었다. 그리고 지금 부터 다시 300년 세월이 흐른 소나무의 모습을 그려봤다. 먼 미 래 누군가가 현석(玄石)의 그림을 보고, 이 소나무를 찾고자 길 을 나서는 경우를 상상해 봤다.

지난 수백 년을 바위절벽에서 버텨온 강인한 기골을 생각하면 이 룰 수 없는 꿈은 아니리라.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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