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 시평] 대통령제가 흔들린다 / 조중빈(정외)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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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갈 때는 세상사가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상례다. 모른 바 아니지만 정치권의 연말연시는 그야말로 예의를 벗어나다 못해 동물적 투쟁으로 한 해의 멱통까지 채우고 있으니 덕담이 나가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입헌주의는 신사(紳士)들의 게임이다. 법의 정신이 신사들 사이에서 존경받지 못하면 헌법은 종이 위에 쓰인 글자일 뿐이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는 헌법을 지켜줄 군대도 경찰도 없다. 이를 확실하게 증명해 준 것이 군사독재체제였다. 그렇다면 문민정치 아래에서는 헌법이 드디어 신사들의 게임으로 자리잡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헌법이 유린되면 민주주의가 유린된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헌법도 무시할 수 있다는 상식(?)이 기세등등하게 시민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끝나지 않은 '시민혁명'론은 대중을 향한 웅변이라고 치부하더라도 비신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시민운동'을 이야기해도 뭐할 판에 '혁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 혁명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민주선거를 통해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혁명이 왜 다시 필요한가? 정치적 수사로 끝나는 일과성 사건이었다면 걱정을 덜 하겠다. 하지만 숨 고를 사이도 없이 터져나오는 초법적 폭탄선언이 우리의 법의식을 마비시킨 지 이미 꽤 되지 않았는가? 대통령직을 퇴임하겠다는 발상도 범상한 것이 아니다. 헌법상 대통령이 임기를 못 마치고 퇴임해야 되는 경우는 탄핵을 받는 경우다. 자기가 임의로 기준을 정해 놓고 임의대로 대통령직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헌적이며 위협적이다. 국가와 국민을 경홀히 여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뿐인가? '재신임' 문제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지겹게 되었지만 이 또한 위헌임이 판명되었다. 그래도 헌법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위를 해보자. 대통령이 하도 힘이 없고, 억울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이해하자. 하지만 해법은 헌법을 뒤흔드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 힘이 없다고 하는데 대통령과 그 측근의 현재 정도 국정수행 능력과 도덕성을 가지고 이만큼 꾸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이 가진 권력의 프리미엄 때문이다. 연일 위헌적 정치전략을 구사해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것도 프리미엄이라면 프리미엄이다. 유권자의 과반수에 못 미치는 지지를 가지고 적대적인 국회와 싸워야 하는 것이 소수파 대통령의 어려움인데 대통령제가 아니라면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내각제라면 지금과 같은 정국구도 속에서는 당연히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되고 타협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에서도 타협은 필수다. 민주화 과정 중에 있는 많은 나라에서 대통령제가 실패한 이유는 권력을 나누어 갖는 데 실패한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상대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은 대통령제에서 활용될 수 있는 전략이지만 기성의 정치과정을 무시한 채 열혈당원들만을 동원하는 데 골몰하게 되면 자기 소외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통령제 자체까지도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은 대통령제의 최대 수혜자다. 대통령이 대통령제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각제로 가는 길밖에 없는데 권력구조의 변화가 이렇게 와서야 되겠는가? "민주당 찍는 것은 한나라당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 속에 담긴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명이라도 자파 국회의원을 더 만들어 국정을 시원스럽게 펼쳐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한국 정치가 아무리 암담해도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면 선거에서 관권을 퇴출시키고, 금권에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인데 대통령이 앞장서서 선거법의 정신을 위반한다면 아슬아슬하게 키워가고 있는 민주선거의 씨앗을 밟아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헌법과 대통령제와 선거법이란 화두는 새해 벽두부터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오직 기대하기는 살아 있다는 증거로 끈질기게 정치권을 응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중빈 국민대 교수.정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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